(서울=연합인포맥스) 경영권 상속과 관련해 작고한 국내 간판 재벌의 창업주 A씨가 생전에 자녀에게 해준 얘기는 귀를 붙잡는다.

"실력을 겸비하고, 고객의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면 자연스럽게 상속할 수 있어지며(있으며), 경영권을 그냥 받아 갈려고(가려고) 하지 말고, 네가 능력껏 가져가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불행하고 회사도 불행해진다."

평소 건강이 좋지 못한 이건희 회장이 긴급 스텐트 시술로 고비를 넘겼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건강이 앞으로 회복되더라도 출근해서 의욕적으로 경영을 챙기는 일은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이 회장은 현재 그룹의 경영권 승계 및 후계구도와 관련해 완결하지 못한 일들을 남겨 놓고 있다. 특히 지배구조 개편의 핵심인 삼성에버랜드의 처리를 비롯한 사업 재편 등은 아직 진행형이다. 갈 길은 바쁘고 시간은 촉박한 삼성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한국 재벌들의 경영 승계 프로그램의 시행착오와 취약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대권은 5년 단임의 선거를 통한 '거버넌스 교체'의 틀을 갖추고 있지만, 경제권력의 한 축인 재벌의 경우는 각 집안 분위기와 가풍, 선대의 성향에 따라 승계가 개별적으로 진행되며 민주적 절차와 투명성이 취약한 게 사실이다.

승계의 성공 여부에 따라 그룹의 위상이 크게 성장도 할 수 있고 추락할 수 있는 쌍방향 위험이 존재한다. 총수 생전에 자녀 경영 승계와 상속을 명쾌하게 교통정리 하지 못해 사후 경영리스크로 번지는 경우도 생긴다.

이는 총수 자신의 생몰 시점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인간적인 한계가 주요 원인이지만, 무엇보다 건강이 멀쩡한 생전에 상속을 완료하면 총수 권력이 레임덕에 휘말리게 되는 것을 꺼린 탓이다. 권력을 내려놓는 순간부터 '뒷방 늙은이'가 되는 것을 감내해야 하는데, 피땀 흘린 성취를 담담하게 자식에게 내주기란 보통 내공이 아니면 어렵다.

뿐만 아니라 왕성한 사업 확장과 성취욕이 강한 총수일수록, 평소에 너무 바빠 승계 프로그램에 신경을 쓸 여력도 없다. 자칫 자녀나 측근들이 총수 생전에 승계 프로그램을 만들어 속도를 내다가는 '아버지가 일찍 죽기를 바라는 고얀 놈'으로 찍혀 회생 불가능해지는 일도 있었다. 측근이 구권력과 신권력의 눈치 살피는 딜레마에 빠져 시간만 보내다가 엉겁결에 일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 재벌가의 경영승계에서 자녀간의 볼썽사나운 분쟁은 100%가 선대의 책임이라고 볼 수 있다. 생존 시에 명쾌하게 정리해 주지 않으면 우애가 좋던 자녀도 원수지간이 된다. 이들 각자 뒤에 딸린 친인척들, 계열사 경영자, 주주 등의 이해관계가 난마처럼 얽히기 때문이다. 선대와 동고동락했던 이들은 짐을 싸고 새로운 신진세력들이 등장한다. 신세력간에 알력도 비등해진다. 자녀들은 각자 이런 이해 관계자의 대표 선봉이 될 수밖에 없다. 그룹 입장에서 대외환경이 급변하는 데 이런 혼돈기가 겹치면 위험해 질 수 있다.

국가 GDP의 25%를 차지하는 삼성이 앞으로도 과거 같은 성장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그룹 소속 임·직원과 국내·외 주주, 협력업체를 비롯해 정부 등 이해관계자, 투자가들을 포함한 전 세계인들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취재본부장/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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