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열석발언권'의 사전적 의미는 회의에 참석해 발언할 권한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발언권은 말 그대로 극히 제한적인 의사표시의 한 방식일 뿐이다.

지난 2010년 1월. 기획재정부가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열석발언권을 행사하겠다고 공표하자 조금 과장해서 온 나라가 들썩였다.

한은 측은 기준금리 결정은 금통위 몫이라며 애써 담담한 반응을 보였지만 '관치금융'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금융권과 시장에서는 정부가 중앙은행을 접수한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돌았다. 정부의 개입강도가 세진 이상 적어도 조기 금리인상은 물 건너갔다는 인식이 파다했다.

정부의 열석발언권 근거조항은 '기획재정부 차관 또는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금통위 회의에 열석해 발언할 수 있다'고 규정한 한국은행법 91조다.

법에 근거한 것인 데다 발언권 하나 얻는 게 무슨 대수냐는 논리는 이때만 해도 통하지 않았다. 여론은 상대적 약자인 중앙은행 편이었다.

열석발언 초기 재정부 차관은 금통위원들의 통화정책 방향에 대한 논의과정과 금리 의결 절차까지 거의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금통위원들 입장에서는 심적으로 압박감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2010년 6월 재정부는 한발 물러섰다. 열석발언권이 사전적 의미와는 달리 금통위 의사결정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여론이 비등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재정부 차관은 금리 의결에 앞서 열석발언을 행사하고서 바로 퇴실했다. 금통위원들은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통화정책 방향을 결정할 수 있게 됐다.

이 상태로 1년 7개월이란 시간이 더 지나갔다. 몇 번 행사하다가 자연스럽게 중단되지 않겠느냐는 한은의 기대와 시장의 예측은 빗나갔다.

1998년 한은법 개정 이후 정부가 열석발언권을 행사한 사례는 4차례에 불과했다. 참석 이유도 취임을 겸한 상견례 성격이거나 부처간 조직개편 의견개진 등이어서 통화정책 방향을 논의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이번에는 정부의 의지가 남달랐던 걸까. 재정부 차관은 2010년 1월부터 최근까지 모두 36회에 걸쳐 금통위 본회의에 참여했다. 열석발언은 어느새 일상이 된 듯하다. 시장 반응도 갈수록 무감각해지고 있다.

이는 정부의 열석발언 영향력이 유명무실해졌다는 의미도 된다. 파급력도 없는 무의미한 권한 행사를 명분도 없이 계속 끌고 가는 게 바람직한 것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정부와 중앙은행의 정책 공조는 지금도 충분해 보이다. 열석발언 당사자인 재정부 1차관과 금통위원 중 한 명인 한은 부총재는 거시정책협의회라는 매개체를 통해 매달 만남을 갖는다. 이 자리에는 재정부 주요 국·과장과 한은 간부들도 동석한다. 양 기관이 충분히 의견을 교환하고서도 무의미한 열석발언권을 계속 유지할 이유가 있는지 의문이다.

한은의 한 관계자는 "재정부가 열석발언권을 장기간 행사하는 것은 보험 성격이 강해 보인다"며 "중단했다가 만의 하나 재개하려면 여론의 비난을 또 한 번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특별한 명분이나 이유가 없어도 계속 끌고 가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채권시장 한 딜러는 "더는 시장의 관심거리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번 정권까지는 열석발언권을 행사하지 않겠느냐"고 전망했다.

(정책금융부 채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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