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18년간 재직했던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장은 통화정책 회의 전에 항상 속옷 판매량을 점검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여성 속옷이 많이 팔리면 경기가 꺾이는 것으로 판단했는데, 경기가 좋지 않을 때 여성들은 값비싼 겉옷 소비는 자제하고, 저렴하지만 화려한 속옷을 구매함으로써 심리적 위안을 삼는다고 봤기 때문이다. 남성 속옷이 잘 팔릴때는 경기가 좋다는 신호로 판단했다. 주부들의 구매목록에서 맨 마지막 순위가 남편의 팬티이기 때문에 남편의 팬티가 많이 팔린다는 것은 다른 모든 물건들이 잘 팔린다는 뜻으로 봤다는 것이다.

최근 각국 중앙은행들을 살펴보면 눈에 띄는 현상이 있다. 그린스펀처럼 실물경제의 동향을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근로자들의 임금을 중앙은행들이 챙기기 시작했다는 게 시선을 끈다. 미국과 영국, 독일, 일본 등 선진국 중앙은행은 최근 약속이라도 한듯이 임금 얘기를 화두로 꺼냈다.

재닛 옐런 연준 의장은 지난주 통화정책 회의를 마치고 앞으로 기준금리를 올리기 위한 조건으로 임금 상승률이 중요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경제회복을 판단할 때 실업률이나 취업자 수 등 양적인 면만 볼 게 아니라 근로자가 얼마나 돈을 받고 일하는지 질적인 면도 보겠다는 뜻이다. 이를 두고 월가는 포워드 가이던스의 기준이 임금으로 바뀌었다고 평가했다.

옌스 바이트만 독일중앙은행 총재는 독일의 임금상승 속도가 빨라지는 것에 대해 낙관적인 평가를 했다. 전통적으로 인플레이션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독일중앙은행의 이같은 반응은 이례적이다. 이는 유럽 전반에 퍼진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크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유럽중앙은행(ECB)도 독일의 입장에 대해 공감한다며 맞장구를 쳤다.

영국 중앙은행의 7월 통화정책 회의는 임금상승률이 핵심 이슈였다. 통화정책 위원 중 일부는 실업률이 떨어졌으니 금리를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다른 한편에선 임금인상률이 저조하다는 이유로 금리인상 시기상조론을 펼쳤다. 최근 발표된 영국의 3개월(3~5월) 임금상승률은 0.7%로 사상 최저수준으로 떨어졌다. 영국 중앙은행은 실질임금이 오르지 않는 상황에서 금리를 올리면 경제회복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일본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까지 직접 나서 독려하고 있으나 임금상승 속도가 미진하다. 이 때문에 일본은행(BOJ) 관계자들은 최근 임금이 오르지 않아 소비가 회복되지 않고 경제도 살아나지 않고 있다고 고충을 토로한다. 최근 일본에서 발표한 지표를 보면 가계의 현금수입이 0.4% 늘어나는데 그쳐 5월의 0.6%보다 상승세가 둔화했다.

세계 중앙은행들은 왜 임금 인상을 한목소리로 요구할까. 나라마다 사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된 인식의 흐름은 있다. 경제살리기는 통화정책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 돈만 풀어서는 경제회복이 어렵다는 뜻이 담겨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들은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려 했으나 풀린 돈은 금융시장으로만 흘러가 큰 손들 좋은 일만 했다. 실물경제는 돈맥경화를 겪으며 내수부진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었다. 미국은 청년실업 문제와 낮은 수준의 최저임금 문제가 겹치며 내수회복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일본도 내수회복에 안간힘을 쓰고 있으나 제대로 불붙지 못하고 있다. 내수는 선진국의 공통된 고민이다.

경기가 회복되려면 내수가 살아야 되고, 임금이 올라가면 중산층의 지갑이 두둑해져 내수가 회복된다. 소득불균형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고 상생할 수 있는 경제의 선순환을 끌어낼 수 있다. 금리인상을 준비하는 미국과 영국도 물론이고, 디플레이션을 막으려는 일본과 유럽도 임금 인상을 통한 내수 회복이 공통의 키워드다.

그러나 임금상승에는 논란도 여전히 많다. 임금이 올라가면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생산성이다. 일자리가 줄지 않고 임금이 올라가려면 생산성이 향상돼야 한다. 임금만 올라가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지만 숙제는 여전히 많다.

정부와 중앙은행이 닦달한다고 기업들이 채용을 늘리는 세상도 아니다. 일본의 경우 도요타와 혼다 등 대표기업들이 춘계협상에서 임금 인상에 합의했으나 시행에는 뜸을 들이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몇년째 정부에서 기업의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독려하고 있지만 실제 결과물은 눈에 띄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오는 21일부터 사흘간 미국의 휴양지 와이오밍주 잭슨홀에서는 지구촌 중앙은행가들이 모여 세계 경제의 현안을 논의한다. 이번 회의의 주제는 '노동시장의 역동성에 대한 재평가(Re-Evaluating Labor Market Dynamics)'다. 이는 최근 각국 중앙은행이 임금 인상 문제를 집중적으로 얘기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잭슨홀 회의를 계기로 앞으로 중앙은행의 화두는 '고용과 임금'에 집중될 것으로 전망된다.

(국제경제부장)

(서울=연합인포맥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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