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ㆍ프랑크푸르트=연합인포맥스) 고유권 기자 = 대규모 산업화를 지향하던 성장주의 시기에 정책금융의 역할은 중요했다.

특히 한국처럼 변변한 자원이나 막강한 자본력을 갖추지 못해 수출로만 먹고 살아야 했던 나라에서 정책금융은 소금과도 같았다.

조선소와 제철소를 지어 산업의 물꼬를 트고 고속도로 등 대규모 인프라를 구축해 성장의 기반을 갖출 수 있었던 것도 정책금융이 주도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경제가 성숙하고 국가간 통상마찰이 심화해 과거의 특수성이 사라지면서 주요 선진국들은 정책금융 역할을 축소하고 있다.

일본은 과거 고이즈미 정부 시절 정책금융기관 개혁방안을 마련해 8개 기관을 하나로 통합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도 했다.

독일의 경제 성장에 힘을 실어줬던 정책금융기관들의 역할도 다소간의 변화를 보였다. 유럽연합 출범이후 독일 정책금융기관들의 보증책임제계 등이 경쟁정책에 어긋난다는 지적들이 나온 탓이다.

우리나라는 박근혜 정부들어 '정책금융 역할 재정립 방안'이 수립되면서 대내외 정책금융을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으로 이원화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는 세계적인 흐름과 궤를 같이 한다.

그렇다면 갑작스레 북한과의 통일이 실현된다면 그 역할을 누가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의 꼬리표가 붙기 시작하고 있다.

인프라가 낙후하고 산업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북한을 우리 경제권으로 포함시키려면 막대한 자금과 노하우가 필요하다.

특히 심각하게 차이를 보이는 남한과 북한의 경제력을 이른 시일내에 극복하지 못한다면 통일비용 증가는 물론 사회적 통합에 막대한 저해 요인이 될 수 있다.

결국 북한 지역의 경제 부흥을 위한 효율적 대안으로 정책금융의 역할이 다시 한번 부활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될 것이란 전망이 많다.

'통일대박'이란 말이 함축하고 있듯이 북한 지역 개발은 저성장의 늪에 빠져 있는 우리 경제에 새로운 성장동력을 제공하고 한반도 경제공동체 구축을 통해 내수와 수출을 모두 살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뚜렷한 지향점을 가진 정책금융의 책임은 더욱 필요하다.

독일의 정책금융기관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경제재건을 위해 1948년 프랑크푸르트에 설립된 KfW(독일재건은행)의 통독 이후 역할은 국내 정책금융기관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통독 이후 독일 정부는 동독 지역에 있던 기업들의 민영화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기업들의 경쟁력을 빠르게 회복하기 위한 조치로 외자유치를 추진했다. 하지만 부작용은 컸다. 동독 지역의 일자리 80%가 사라지면서 실업률이 치솟은 것이다.

이때 KfW가 나섰다. 서독 지역의 은행들을 끌어들여 동독에 있던 기업들에 투자를 단행했다. 이 결과 사실상 불모지였던 동독에 은행을 중심으로 한 금융의 피가 돌기 시작했다.

1990년대 말까지 동독 지역에 생긴 은행 지점만 6천여개에 달했다. 은행과 관련한 일자리만 8만5천개가 생겼다.
 

<한스 피터 뮤지히 독일재건은행(KfW) 전 부행장>

한스 피터 뮤지히 KfW 전(前) 부행장은 "동독을 현대화 시키는데 KfW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금융의 도입으로 동독 지역의 경제 구조가 회복될 조짐을 보이면서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를 중심으로 산업적 기반도 확대됐고 기술적으로 숙련된 인력들이 동독 지역으로 많이 이동하면서 경제ㆍ산업적 선순환도 이뤄졌다.

그러나 KfW는 금융지원시 직접 나서지 않았다. 시중은행들을 통한 간접지원으로 효율성을 높였고 효과는 컸다.

뮤지히 전 부행장은 "서독 은행들이 일단 들어오게 하고 그 은행들에 자금을 지원해 주면 은행들이 판단해 대출을 하는 구조였다. 이런 방식으로 1990년부터 2000년까지 6천여개의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했다"고 말했다.

그는 "KfW가 간접대출 방식을 활용한 것은 각 지역에 분산돼 있는 기업들은 해당 지역의 은행들이 가장 잘 알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며 한정된 재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할 수 있는 정책이었다고 강조했다.

정책금융의 역할로 동독 지역내 은행 수가 확대되면서 제대로 된 금융이 이뤄지고 이를 통해 기업들의 활로가 개선돼 고용이 늘고 임금 수준이 커진 영향은 적지 않았다.

KfW가 1990년부터 7년간 동독의 투자활성화로 위해 투입된 자금은 1천58억 마르크에 달했다. 이로써 생긴 일자리만 2천500만개에 이르렀다.

1989년 0.1%에 그쳤던 동독 지역 기업에 대한 자금공급은 1990년 33.6%로 급증했고, 1992년엔 62.3%까지 확대됐다. 동독 지역에 대한 정책금융 자금의 집행이 얼마나 집중됐는지를 보여주는 결과다.

무엇보다 KfW의 자금이 중소기업에 집중적으로 투입된 것은 현재의 독일 산업구조가 중소기업 위주로 재편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자금 뿐 아니라 성장을 위한 정책금융의 노하우 전수도 동독 기업들의 '자본주의' 통일 독일에 쉽게 편입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에버하트 홀트만 할레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장은 "동독 지역 기업들이 성장한 것은 외부 자본의 선진 경영이 가미됐기 때문이 아니라 공산주의 체제에서 생산방식이나 마케팅 같은 전략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보완해 주고 노하우를 전수해 주는 과정이 이어지면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체제에서 제대로 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동독 지역의 경제가 살아나고 정책금융의 지원과 투자로 인프라 기반이 확대되면서 포르셰나 BMW와 같은 대기업들이 동독 지역에 생산거점을 마련한 것은 선순환의 좋은 사례가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pisces738@yna.co.kr

(끝)

저작권자 © 연합인포맥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