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미국 정부가 우리 정부에 던진 메시지가 심상치 않다. 미국은 지난 15일 발표한 환율보고서에서 "원화의 추가절상을 허용해야 한다"(the won should be allowed to appreciate further)고 지적했다. 이제까지의 보고서에서 가장 수위가 높은 표현이다. 미국은 4월 보고서에서 "시장 개입은 무질서한 시장 환경이라는 예외적인 상황에 제한해고, 개입의 투명성도 높여야 한다"고 했었다. 4월에 없던 '원화 절상을 허용하라'는 말이 명시적으로 보고서에 등장한 것이다.

정부의 공식 문서에 '~해야 한다(should)'라는 방식의 표현이 들어가면, 상대국으로선 부담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미국은 G2 상대국이자 강대국이 된 중국을 상대로는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위안화 절상이 타당하다(warranted)' 정도의 말로 에둘러 표현한다. 표현방식으로만 보면 미국은 유독 우리 외환당국에만 명령형으로 환율절상을 요구한 셈이다. '환율적성국'인 중국을 상대로도 고운 말을 하는 미국이 왜 우리에게는 이런 대우를 하는지 의문이 든다.

이상한 점은 또 있다. 미국은 환율보고서를 내면서 언론을 상대로 보도자료 형태로 요약본을 제공한다. 이 요약본의 변천사를 보면 우리를 상대로 한 미국의 요구와 압박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피부로 느낄 수 있다. 2012년까지만 해도 미국은 요약본에서 우리나라를 언급하지 않았다. 2013년 10월에 우리나라 환율정책에 대한 평가가 처음 등장한다. 당시엔 간단하게 한 문장으로 말했다. '예외적 환경에서의 개입과 개입의 투명성 문제'를 원론적인 톤으로 언급했다. 이듬해 4월에는 한문장이 더 붙어 두 문장으로 늘어났고 10월엔 세 문장이 됐다. 그 세번째 문장은 '환율절상 허용하라'는 말이다. 점점 분량이 늘어나고 강도가 세지고 있다. 미국이 원하는 대로 원화가치는 올라가고 있는데 도리어 미국의 환율절상 요구는 점점 거세지는 것이다.

더 이상한 건 일본에 대해 미국이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것이다. 4월 요약본에서 미국은 일본의 정책을 주의깊게 모니터링하겠다는 한 문장으로 갈음했다. 10월 요약본에서는 모니터링하겠다는 얘기도 아예 빼버렸다. 대신 일본이 소비세 인상 이후 경제성장이 불투명해졌다고 오히려 걱정하는 말을 넣었다. 아베노믹스가 돈을 풀어 엔저(고환율정책)를 유도한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도 미국은 입을 다물고 있다. 일본엔 관대한 미국이 전통적 우방인 우리에겐 왜 까탈스러운가.

그 의문을 푸는 열쇠는 복잡한 한반도 정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피봇 투 아시아(아시아 회귀정책)'에 집중하는 미국은 강대국으로 떠오른 중국을 견제하는 게 외교전략의 제 1 목표이며, 이를 위해선 일본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이 미국이 일본의 환율정책에 관대한 이유일 것이다. 반면 경제 이익을 중심으로 한 한국과 중국의 밀월관계는 미국의 아시아 외교전략에 부담요소다. 한국은 현재 중국과 자유무역협정(FTA), 위안화 직거래 등을 논의하고 있다. 요우커(중국 관광객)들은 해마다 한국을 방문해 천문학적인 돈을 뿌리고 간다. 차이나 머니로 불리는 중국 자본은 우리 주식, 부동산 시장에 거침없이 몰려들고 있다. 중국은 후강퉁 등 자본시장을 개방해 한국을 끌어들이고 있다. 경제적으로 가까워지면 모든 게 가까워지는 세상이다. 한국이 중국 경제권으로 편입되면 미국의 외교전략에도 차질이 생긴다. 미국이 표면적으로는 우리 환율을 문제삼고 있지만 복심엔 중국과 더 이상 붙지말라는 경고를 한 것으로 분석된다.

조바이든 미국 부통령은 작년 12월 한국을 방문해서 "미국의 반대편에 베팅하는 건 좋은 베팅이 아니다"라고 했다. 작년 10월 환율보고서에 한국 환율정책을 처음 언급한 지 2개월만에 나온 초강경 발언이다. 그리고 올해들어 한국 정부에 계속된 환율정책 압력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 경제의 아킬레스 건은 환율이라는 점을 미국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바이든 부통령이 외교버전의 베팅을 말했다면 환율보고서는 경제버전의 베팅을 말한 셈이다.

미국의 환율보고서와 외교정책이 인과관계가 있다고 하는 건 지나친 비약일 수 있지만 상관관계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환율절상하라는 미국의 말엔 날카로운 가시가 담겨 있다. 그 가시에 찔린 우리 정부로선 뼈 아팠을 것이다. 우리가 경제적 이익(중국)과 군사.외교적 이익(미국)을 같이 얻을 수 있는 길은 있을까. 중국과 가까워지면 미국은 환율보고서의 수위를 높여 우리를 압박할 것이고, 미국과 가까워지면 중국은 경제적 불이익을 줌으로써 우리에 부담을 줄 것이다. 한국 여행에 규제를 가한다거나 차이나 머니를 회수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겁줄 수 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몸값을 높여 우리나라의 이익을 찾는다면 최고의 전략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과거 역사를 보면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이리저리 위협을 받으며 위축된 적이 많았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우리 외교.경제당국의 묘안을 기대해본다.(국제경제부장)

(서울=연합인포맥스)

jang73@yna.co.kr

(끝)
저작권자 © 연합인포맥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