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고유권 기자 = 국내 대기업 총수 가운데 인수ㆍ합병(M&A) 전문가라면 두산그룹의 박용만 회장이 가장 먼저 거론된다.

OB맥주를 팔던 두산은 지금 전세계를 대상으로 굴착기와 소형건설장비를 수출하고 있고, 전세계 바닷물을 먹을 수 있는 물로 바꿔 놓고 있으며,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는 현장에 두산이라는 브랜드를 심고 있다.

이렇듯 2000년 이전의 두산과 그 이후의 두산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신했다.

가진 것을 모두 팔고 새로운 것을 사면서 기업의 사업구조를 완전히 뒤바꾸는 거대한 실험을 해 온 결과다. 그 중심에는 박용만 회장이 있었고 그는 실험의 도구로 M&A를 십분 활용했다.

박 회장을 'M&A 아이콘'으로 꼽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이런 박 회장이 최근 들어 잠잠하다.

지난 3월 말 그룹사업을 총괄하는 대권을 이어받은 박 회장은 지난달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M&A를 할 만한 대상은 여럿 있지만, 딱히 끌리는 곳은 없다"면서 "현재 추진 중인 M&A는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M&A라는 도구를 여전히 손에서 놓지는 않고 있지만, 당장 또 다른 실험을 하기에는 적절한 시점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재계에서는 그간 수많은 기업을 인수하면서 이제는 내실을 다질 때가 되지 않았겠냐고 해석하고 있다. 또, M&A를 통해 그룹 전체의 재무적 부담이 가중돼 온 터라 당분간 대규모 M&A에 나서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예상도 있다.



◇M&A는 '두산 웨이(Way)' = 두산의 핵심 계열사인 두산중공업의 최고위급 임원은 지난 2010년 1월 한 모임에서 기자에게 "순환유동층(CFB) 보일러 핵심설비의 원천기술 확보를 위해 외국 기업 인수를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9년 체코의 스코다파워를 인수하면서 보일러, 터빈, 발전기 등 발전소의 3대 핵심 설비의 원천기술을 모두 확보했지만 CFB 보일러의 원천기술만큼은 아직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CFB 보일러는 발전 용량은 크게 늘리고 대기 배출가스의 양은 크게 줄이는 친환경 연소기술이 적용된 설비로 저탄소 그린에너지 분야를 미래성장동력으로 육성하려는 두산중공업에 중요한 사업분야였다.

그로부터 거의 2년이 다 된 작년 11월 두산중공업은 유럽의 자회사인 두산파워시스템을 통해 독일의 발전설비업체인 AE&E렌체스를 870억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AE&E렌체스는 발전소 기자재 제작과 엔지니어링 분야에서 세계적인 업체로 CFB 보일러 등 친환경 발전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이는 두산의 인수ㆍ합병(M&A) 전략을 바로 보여주는 사례다.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필요한 사업이라면 전세계에 퍼져 있는 관련 기업들을 찾아내 반드시 인수한다는 두산의 전략은 이젠 대한민국 대기업의 'M&A 교본'처럼 됐다.

두산이 M&A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기업이 성장하려는데 혼자서 다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남의 역량을 빌리기도 하고 사들이기도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기업 가운데 M&A를 통해 사업구조를 완전히 탈바꿈한 곳은 두산이 유일하다.

1998년 외환위기로 휘청이던 부실사업들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중장비와 발전설비, 기계 등 인프라구축 지원사업(ISB, Infrastructure Support Business)을 축으로 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난 곳이 바로 두산이다.

두산은 지난 2001년 이후 최근까지 매년 많게는 3건, 적게는 1건 이상씩 꼬박꼬박 다른 기업들을 인수해 왔다.

2001년 3천57억원을 들여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을 인수하며 M&A시장에 발을 들여 놓은 이후 2003년 고려산업개발(현 두산건설), 2005년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를 인수하면서 사업구조를 완전히 바꿨다.

2006년에는 발전소 보일러 원천기술을 보유한 영국 미쯔이밥콕(현 두산밥콕)을 인수하면서 크로스보더 M&A를 본격화했고, 2007년에는 국내 기업의 크로스보더 M&A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잉거솔랜드의 밥캣 등 3개 사업부문을 무려 49억달러를 들여 인수했다.

이후에도 체코의 스코다파워, 인도의 AE&E 첸나이웍스 등을 외국 기업들에 대한 인수를 지속하면서 'M&A 명가'로서의 위상을 이어왔다.



◇'밥캣' 리파이낸싱 성공했지만… = 두산에 '밥캣'은 최고의 M&A 성과물로 자랑거리였다. 하지만, 지난 수년간 골칫덩어리이기도 했다.

49억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들여 인수했지만 정작 실적 부진에 허덕이며 '빚 부담'을 키웠고, 결국 그룹 전체 유동성 위기설을 불러 온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두산은 2007년 자회사인 두산인프라코어가 주축이 돼 미국의 건설장비 업체인 밥캣을 인수하면서 은행권으로부터 29억달러의 신디케이트론을 받았다.

작년 말까지 두산은 이 가운데 6억1천만달러를 갚았고, 22억9천만달러를 차입금으로 남겨둔 상태였다. 그러나 올해 말부터 차입금의 만기가 차근차근 돌아오는데 이를 사전에 막지 않으면 유동성 문제로 번질 수 있었다. 시장의 우려도 매우 컸다.

이에 따라 두산은 채권단과의 빚 재조정(리파이낸싱)에 착수했다. 당장 갚을 수 있는 돈이 아니었기에 조금이나마 유리하게 빚 상환 기간과 조건을 바꿔보자는 생각에서였다.

끈질긴 채권단과의 협상 끝에 두산은 결국 리파이낸싱에 성공했다.

채무 만기를 늘렸고, 금리도 낮췄다. 두산의 발목을 잡아왔던 '부채/에비타(EBITDA) 7배 이하 유지' 금융약정(Finnacial covenant) 조항도 없앴다. 이전보다 한결 완화된 조건이다.

운 좋게도 밥캣의 실적도 나아지고 있다. 올해 1분기에 매출은 전년 동기보다 37% 늘어난 9천556억원, 영업이익은 무려 626% 급증한 626억원을 달성했다.

미국 시장의 경기 회복에 맞춰 수요가 늘었고, 최근 생산능력이 확충되면서 실적이 큰 폭으로 좋아졌다.

다만, 여전히 미국 경기 회복은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특히 완화된 리파이낸싱의 효과를 누리려면 밥캣의 실적 개선이 필수적이다.

신용평가사의 한 관계자는 "밥캣이 흑자로 돌아선 것은 긍정적이지만 미국의 상황을 볼 때 실적이 당장 크게 좋아질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영업현금창출을 통해 이자를 갚을 정도만 되면 좋겠지만, 낙관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리파이낸싱 성공에도 두산을 바라보는 크레디트 시장의 반응이 크게 호의적으로 변한 것도 아니다.

차입금 중 일부를 상환했음에도 차입금 대부분을 롤오버한 것에 불과해 채무에 따른 부담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증권사의 한 크레디트 애널리스트는 "차입금의 만기를 장기화한 것에 불과하다. 단기적인 차입 부담이 완화된 것은 긍정적이지만 펀더멘털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 '아! 두산건설' 어이할꼬 = 밥캣 문제에서 어느 정도 한숨을 돌린 두산에 또 다른 골칫덩어리가 생겼다. 바로 두산건설이다.

부동산 경기침체 여파로 주택경기가 여전히 냉각된 상황에서 막대한 빚 부담이 여전히 막대한 재무적 리스크로 남아 있어서다.

2010년부터 대형 사업장을 중심으로 공사미수금 회수가 부진하고 대여금을 지급하면서 차입금이 크게 늘었고 지난해 대규모 유상증자에도 프로젝트파이낸싱(PF) 우발채무가 남아있어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가 쉽지 않은 상태다.

주택관련 PF 우발채무는 작년 말 기준으로 1조740억원에 달한다. 전년 말보다 3천800억원 가량 줄어든 수치. 그러나 여전히 절대 규모가 커 재무적 압박이 이어지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시장에서는 두산건설의 재무 리스크를 그룹 전체의 유동성 문제로 의식하고 있을 정도다. 두산은 밥캣으로 겪었던 고생을 이번엔 두산건설 때문에 또다시 겪고 있다.

유상증자와 두산메카텍과의 합병 등 그룹 차원의 지원에도 분양시장이 살아나지 않는 상황에서 그 효과는 크게 가시화되지 않고 있다.

신용평가사 관계자는 "일산 제니스 등 진행 중인 사업장에 대한 추가 자금 투입이 불가피한 것으로 보여 그룹의 지원 가능성에 대해 면밀히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두산은 올해를 기점으로 두산건설의 실적이 좋아지면서 재무적 리스크도 크게 감소할 것으로 보여 시장의 우려도 완화될 것으로 기대했다.

두산건설 관계자는 "작년부터 주택사업부문에서 미분양세대가 감소하고 있고, 메카텍BG의 해외수주도 2010년 3천300억원, 2011년 4천950억원 등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어 올해는 턴어라운드가 본격화 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두산건설은 올해 2조5천억원의 매출에 1천300억원의 영업이익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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