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정지서 기자 = 기업 구조조정을 두고 골머리를 앓아온 금융당국이 금융회사의 가격 변수에 개입하는 자충수를 뒀다.

금융회사의 가격과 배당, 인사 등의 내부 경영에 개입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반년도 안 돼 번복한 셈이다.

4일 금융당국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감독원은 워크아웃 채권 매각업무 가이드라인 제정을 추진하며 은행들과 마찰을 겪고 있다.

금감원이 추진하는 워크아웃 채권매각 가이드라인은 매각 대상의 채권 선정과 매각 진행 방식, 평가와 협의 절차 등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는 게 골자다.

이 과정에서 금감원은 공개 입찰로 진행되는 부실 채권 매각 과정의 최소 매각가와, 협의 매각의 매각 기준 가격의 산정 기준을 제정토록 했다.

은행권은 이러한 지침을 사실상 채권 매각 과정의 가격 변수에 금융당국이 개입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은행권 자율로 가이드라인을 제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략의 기준에 대해 금융당국이 먼저 제시안을 마련한데다, 산정 기준을 제정하는 과정에도 당국의 의중이 반영될 수 있어서다.

지난 1월 총리령으로 시행된 금융규제 운영규정에는 금융당국이 금융회사의 인사를 비롯한 금리, 수수료 등 가격변수 관련 내부 경영에 개입을 금지하는 내용이 담겼다.

지난해 금융규제 전수 조사를 통해 탄생한 금융규제 운영규정은 금융당국의 비공식적인 행정지도를 원칙적으로 폐지하는 차원에서 마련됐다.

당시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금리와 수수료, 배당 등 가격 변수와 관련된 금융회사 내부 경영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엄중히 지키겠다"며 "결정된 규제 개혁을 결코 되돌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비슷한 시기에 진웅섭 금융감독원장도 "금리 인하와 수수료 등과 관련해 당국이 가격 개입을 하지 않을 것"이라며 "업계의 가격 및 수수료 결정은 투명한 메커니즘 아래서 이루어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금융당국 수장의 이러한 다짐이 반년도 채 되지 않아 물거품이 되자, 업계는 크게 실망한 모양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규제산업인 은행의 성격상 금융당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데, 이번 채권매각 가이드라인이 대표적인 사례가 됐다"며 "채권은행은 어려운 기업에 돈을 대출해주고, 수익은 커녕 그 부실까지 책임지게 됐다"고 하소연했다.

이 관계자는 "기업 구조조정이 절박한 시기라는 점은 은행 모두가 인지하고 최대한 노력하는 사안"이라며 "하지만 채권 은행에 대한 자율성까지 침해하며 시장의 원리를 거스르는 것은 산업 전체에 해가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기업 구조조정 방향에 대한 의구심도 제기됐다.

또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유암코를 통해 한계 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진행하는 것은 좋지만, 이 과정에서 채권은행이 헐값에 채권을 매각하는 것만이 효율적인 의사 결정은 아니다"며 "유암코 등의 주체는 금융당국 뒤에 숨을 것이 아니라 실사를 통한 정확한 가치를 가격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금융당국 역시 기준을 통해 가격의 하단이나 상단을 설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시장 가격에 따라 제대로 기업 가치를 평가받아야만 의미 있는 구조조정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jsje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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