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1980년대 한국의 청춘들에게 유럽은 '로망' 그 자체였다. 당시 외신을 통해 유럽인들이 1년에 5~6주 휴가를 떠나는 내용을 읽으면서 '와! 유럽인들은 일이 자아실현을 위한 수단이구나. 또 그것이 가능하도록 사회구조가 설계돼 있구나'며 섣부른 찬사도 보냈다.

유럽처럼 선진국이 되면 모든 국민이 잘살고 모두가 연금을 받으며 품위있게 늙어갈 줄 알았다. 하지만 앞으로 그런 나라는 지구 상에 존재할지 모르게 됐다.

한때 전 세계를 호령하던 유럽 문명의 자부심인 스페인이 은행들의 '뱅크 런'에 쫓겨 절박하게 유럽연합(EU)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는 소식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사건이다. 스페인은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과 달리 유로존의 몸통 국가다. 1천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받아 급한 불은 끄게 됐지만, 빚에 의존해 쌓은 '부채 자본주의'의 본격적인 바벨탑 균열이 시작된 셈이다.

스페인에 대한 지원금 마련은 선진 유럽국가들의 쌈짓돈에서 나온다. 유럽재정안정기금(EFSF)과 유로안정화기구(ESM) 등에 북유럽 국가들과 프랑스, 독일이 갹출하게 되면 이들 국가의 경제운영은 수정되고 유럽 실물 경제는 중장기적으로 침체를 피할 수 없다.

유로존 주변부가 위기에 빠지면 유럽 경제의 기관차인 독일이 돈을 퍼부어야 할 시점이 다가오는 점이 주목거리다. 시장에서는 유로존을 유지한다는 가정하에 앞으로 5년간 독일 국민의 부담이 5,700억 유로에 달하고, 그 바람에 독일 국가 부채는 현재 GDP의 80%에서 5년 후에는 103%대로 늘어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현재 이태리가 1조9,000억 유로로 GDP의 120%, 프랑스 1조7,100억 유로로 GDP의 85%, 스페인 7,100억 유로로 GDP의 69%다. 세수로는 이자를 내기도 어려워 이자를 내려고 다시 국채를 발행해야 하는 악순환에 빠진 상황이다. 독일까지 이러한 '부채의 함정'에 빠지게 되면 유럽의 회복은 기약을 할 수 없다.

유럽의 위기가 특히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에게 주는 정신적 충격은 만만치 않다. 혹시 유럽국가들이 빚내 즐기고 나서 단물 다 빼먹고 한국은 너무 늦게 자본주의 막차를 탄 것 아닌가. 선진 사회제도와 풍요로운 삶을 구가하던 유럽이 휘청대는 걸 보면서 이제 한국은 어떤 좌표를 설정해야 할 것인지 새로운 고민을 해야 할 시점이다.

시장을 작동시키던 보이지 않는 손이 사라진 상황에서 유럽 각국 정부와 민간의 자생력 회복력은 상당기간 기대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각국이 내부 정치에 발목이 잡혀 최악의 위기에 내몰려야만 임시방편을 내놓는 행태가 되풀이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국제 자본들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움직일 것이다. 경기 전망이 의미가 없는 불투명성의 시대에 '더블딥'과 '퍼팩트 스트롬' 등에 '컨틴전시 플랜'을 촘촘하게 마련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당한 기간 전 세계가 부채의 재조정 기간을 고통스럽게 보낼 시점에 한국에는 대통령선거라는 대형 정치 이벤트가 다가오고 있다. 정책 당국자들은 예기치 못한 여러 위기에 만반의 준비를 해야할 것 같다.

(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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