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최근 국내 굴지의 제조업체 대표이사에 취임한 A씨는 지인들과의 축하 저녁 자리에서 자격증 하나를 꺼내 흔들었다. 폭탄주 꽤나 마시는 여론 주도자에게 만들어준 주류업체의 '폭탄주 제조 기능사 1급 자격증'이었다.

증명사진까지 그럴듯하게 붙은 '프로모션'용 공인 자격증을 돌려본 좌중의 반응은 '음매 기죽어'였다.

A씨는 "취임하고 보니, 작전과 전투에 실패한 후배들은 용서되지만, 배식과 의전(儀典)의 실패는 참을 수가 없더라"며 폭탄사(辭)를 했다. 그는 전문 자격증 소지자답게 능숙한 솜씨로 제조한 잔을 보이지 않는 속도로 좌중에 돌렸다. 1인당 12잔이 넘어서자 일부 참석자는 자리에서 실려나갔다.

한국의 CEO는 전 세계 어느 기업 경영자보다 강한 유전자를 가진 종(種)이다. 과중한 업무뿐 아니라 폭탄주 쓰나미에 살아남은 생존자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매년 위ㆍ장 내시경 검사를 거르는 법이 없다. 매일 독배를 마시지만, 동시에 건강을 점검하는 모순적 삶의 전형을 보여주는 셈이다.

지난 2004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세계 일류기업 중에 아침부터 술 냄새 풍기며 출근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기업은 없다"고 경고했다. 당시 삼성전자 사업장에는 '폭음 한 번에 뇌 세포 10만 개가 파괴된다'는 섬뜩한 포스트가 붙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삼성에서는 '술 잘 먹는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이란 이미지가 더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술에 대한 경종은 회장뿐 아니다. 기업마다 직업윤리와 문화가 바뀐 젊은 직원의 불만이 터져 나온다.

"소통을 위해 마신다는 건 황당한 얘기다. 폭탄주로 시작해 노래방에서 마무리하고, 다음날 아침에 쓰린 속을 부여잡고 출근하면 윗사람들은 소통된 걸로 착각한다"

사석에서 고은(高銀) 시인은 저녁 무렵 인사동 길을 걷노라면 여기저기 들려나오는 폭탄 건배 소리에 유혹의 발길이 멈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호방하고 낭만적이며 평등의 정신이 강요되는 분위기에 끌려 다닌 결과는 건강을 잃은 것이었다고 한탄했다.

혹자는 한국에서 벌어지는 정신문화 지체의 근본 원인이 일본을 통한 근대화 때문이며, 일본 병영식 음주문화가 군사정권에 이어졌고 곳곳에 권위주의적 잔재로 남아 우리의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최근 한 대선 후보는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면 국민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찾아줘야 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들고 나왔다. GDP 2만 달러가 넘어선 국가에서 개인이 무엇을 위해 직장생활을 하는지, 개인과 가정의 행복을 위한 목표라면, 술로 말미암은 몸과 마음의 피폐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재점검해 봐야 할 때가 됐다는 얘기다.

해가 떨어지면 수도 한복판 종로와 광화문 일대에 수많은 알코올 중독자가 비틀거리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술에 대해 무한대로 관대한 문화를 버려둔 채 선진국을 꿈꾸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가 아닐까.

(취재본부장)

tschoe@yna.co.kr

(끝)
저작권자 © 연합인포맥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