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만의 분기 적자에 5천명 잘라야 할 처지

공동 CEO 체제로 리더십 흔들…기존 장점 고집하다 혁신 놓쳐



(서울=연합인포맥스) 김성진 기자 = 애플의 아이폰이 등장하기 전까지 스마트폰 시장을 호령하던 블랙베리의 제조업체 리서치인모션(RIM)이 끝 모를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2007년 미국 시장의 41.1%를 차지하던 점유율은 올해 1분기에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3.6%로 떨어졌다.

급기야 지난 2일 마감한 1분기 영업실적은 5억1천800만달러(약 5천950억원, 주당 99센트)의 손실을 기록, 8년 만에 분기 적자를 봤다.

RIM은 28일(현지시간) 실망스런 분기 실적을 발표하며 비용 절감을 위해 전체 직원의 30%에 해당하는 5천명을 감원하겠다고 밝혔다.

업계 수위를 달리던 회사가 5년 만에 이 지경이 된 이유는 뭘까?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날 '다발적인 악수가 RIM의 몰락을 낳다'라는 제목의 분석 기사에서 RIM의 몰락 원인을 최고경영자(CEO)들의 리더십 부재와 사내 갈등, 기존 장점에 대한 집착 등에서 찾았다.

아이폰과 안드로이드폰 등 무서운 경쟁자들이 나타난 영향도 있지만, 회사 내부의 문제로 연이은 자충수를 두다 외부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WSJ는 십여 명의 RIM의 전직 임원들과 회사 사정을 잘 아는 관계자들을 인터뷰해 RIM의 내부를 들춰냈다.

▲공동 CEO 체제의 맹점…견해 차이로 사내 갈등만 키워 = 올해 1월까지 RIM은 공동창업주인 짐 발실리와 마이크 라자리디스의 공동 CEO 체제로 운영됐다.

두 사람은 지난 1월 23일 경영부진과 실적 악화의 책임을 지고 2007년 12월 RIM에 합류한 토스텐 헤인스에게 CEO 자리를 넘기고 동반 퇴진했다.

두 사람은 회사가 성공 가도를 달리던 과거에는 같은 사무실을 쓰면서 활발히 의견을 주고받는 등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회사 덩치가 점점 커져 라자리디스는 연구ㆍ개발(R&D)과 생산, 발실리는 세일즈와 마케팅으로 업무가 명확히 나뉘면서 둘의 사이는 점점 멀어졌다.

특히 회사가 비틀대기 시작하고부터는 두 사람이 직접 만나 의견을 교환하는 경우도 뜸해졌다고 관계자들은 지적했다.

WSJ는 두 사람이 물러나기 전 각자의 사무실은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었으며, 두 명이 함께 참가하는 회의 역시 드물었다고 전했다.

라자리디스와 발실리는 맡은 업무가 다른 만큼 위기의 탈출구도 서로 다른 데서 찾았다.

라자리디스는 새 운영체제를 탑재한 신모델 '블랙베리 10'을 출시해 위기를 벗어나려 한 반면 발실리는 회사의 고유 기술에 대한 사용료를 받는 방안을 놓고 고민했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전략에 골몰하는 사이 RIM은 매각설이 공공연하게 흘러나오는 처지가 됐다.

이미 여러 차례 출시가 지연되면서 올해 연말에나 나올 것으로 예상됐던 블랙베리 10 출시는 내년으로 미뤄졌다.

경영을 넘겨받은 헤인스 CEO는 신모델 출시에 집중하는 한편 기술 라이선스 계약과 구조조정 등도 동시에 추진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회사의 기둥이었던 발실리와 라자리디스의 불화는 두 사람의 문제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리더십 약화는 각기 이끄는 사업팀 간의 갈등으로 번져 고성이 오가는 충돌도 종종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WSJ는 RIM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사내 갈등은 더 격화됐다고 지적했다.

RIM은 이와 관련해 "혁신적인 기업에서 같은 조직에 속한 사람들의 의견이 다른 경우는 늘 있기 마련이나 이것이 표본은 아니다"면서 "공동 CEO 체제는 여러 해 동안 잘 작동해 왔으며 CEO들은 각기 맡은 영역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또 "CEO들은 처음에는 사무실을 같이 쓰다가 회사가 커지면서 각자가 맡은 사업부에 최대한 가까이 있으려고 사무실을 나눈 것"이라고 해명했다.

WSJ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70마일 거리에 있는 RIM의 캠퍼스에서는 매주 '시원한 금요일(Frosty Friday)'이라는 이벤트를 열어 직원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고 전했다.

비용 감축에 착수해 놓고도 RIM은 이 이벤트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RIM은 "아이스크림은 직원들 간 유대를 강화하는 상대적으로 값싼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비즈니스에 적합' 장점에 집착하다 트렌드 놓쳐 = 블랙베리 신화를 낳은 밑거름은 통화와 이메일 기능으로의 특화, 네트워크 보안 강화 전략 등이었다.

비즈니스맨들이 업무용으로 쓰기에 안성맞춤인 스마트폰을 개발함으로써 기업 고객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미국과 캐나다 기업들은 직원들의 손에 블랙베리를 쥐여주며 업무 효율의 향상을 꾀했다.

저널은 그러나 초기 성공의 배경이 됐던 '기업 고객 위주' 전략이 결국에는 스마트폰 시장의 트렌드를 놓치게 하는 걸림돌이 됐다고 지적했다.

스마트폰의 보편화로 동영상 시청과 앱 활용 등 다양한 기능에 대한 개인 이용자들의 요구가 커지는데도 RIM은 기존 모델의 장점에만 매달렸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전직 임원들은 "RIM이 자랑하는 네트워크, 보안 등에 보탬이 되지 않은 혁신은 회피하는 경향이 회사 내에 있었다"고 전했다.

WSJ는 RIM이 트렌드에 뒤처지게 된 배경을 엿보게 하는 된 이유를 한 일화를 소개했다.

10년 전 당시 방크오브아메리카 씨큐리티즈의 애널리스트였던 브라이언 블레어는 "당시 애널리스트들이 라자리디스에게 RIM이 아시아 업체들처럼 컬러 스크린을 장착할 것인지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는 '이메일을 컬러로 읽을 필요가 있느냐'라고 반문했었다"고 말했다.

스마트폰은 업무용에만 적합하면 된다는 고집이 읽히는 대목이다.

RIM은 이에 대해 "당시 컬러 스크린은 실용적이지 못했고, 비용이 비싸고 밧데리를 많이 소모했다"면서 "RIM은 몇 년 후 컬러 스크린을 장착해, 업계에서는 가장 먼저 컬러 스크린을 채택한 축에 속하게 됐다"고 해명했다.

WSJ는 하지만 RIM 내부에서 기존 방식을 고집하는 태도에 지적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뭉개진 적이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2010년 블랙베리가 채택한 키보드 형식의 자판은 앞으로 점유율이 낮아지고, 아이폰식 터치스크린이 인기를 얻을 것이라는 내부 보고서나 나왔는데도 경고가 묵살됐다는 것이다.

경영 실패와 실적 부진이 이어지면서 RIM의 주가는 지난 12개월 동안 거의 70%나 떨어졌다.

이날 분기 실적을 발표하고 나서 RIM의 주가는 시간외 거래에서 13.9% 또 폭락했다.

2008년 6월 150달러에 육박했던 주가는 이제 7.86달러로 떨어져, 10달러에도 못 미친다.

RIM의 시가총액은 최고 정점 때의 15분의 1에도 못 미치는 50억달러로 밑으로 내려갔다.

sjkim2@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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