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에피소드 1] 주가가 오르기를 희망하는 자나, 빠진 주가가 회복하기를 소망하는 자에게 버선발로 뛰어나가 반기고 싶은 이, 주포(主砲).

그 중 한 명으로 지목했던 '은둔의 고수' 권남학 케이원투자자문 대표는 최근 투자설명회에서 이런 얘길했다고 한다.

"최근 10년간 케이원, DS가 잘했으나 지금 다 어려운 상황이다. 인덱스를 매번 이길수 없고, 주식에 용가리 통 뼈는 없다"

굳이 케이원 외에 DS를 언급한 건, 1년 전 주포라고 명명했던 이들이 여전하다는 것을 증명함을 아닐지.

1년 전 혜성같이 등장한 장덕수 회장. 2008년 창립해 꽤 묵은 자문사인 DS투자자문이 뜨자, 업계 사람들은 회사가 본인의 이니셜에서 나왔다고 했다.

'성은 김이요. 이름은 디에스…"라는 노랫가사가 자연스레 떠오르는 그 DS. 그러나 아닐수도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그의 측근은 어떤 상황에서도 두자릿대 수익률(double digit)을 올리겠다는 뜻, 그가 나온 고등학교의 이니셜이라는 뜻에서 지었다고 했다.

서울대를 나오고, 미래에셋자산운용 펀드매니저를 지냈다. 그 후 예술학교에서 공부를 해서 미술에도 조예가 깊다고 알려진 장 회장은, 사실은 신혼 초 어려웠던 기억 때문에 여전히 걷고, 탐방하는 은둔의 삶을 산다.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

엘리트 출신으로 준재벌에 오른 그는 지금도 지하철을 타고 아주 사소한(?) 회사의 IR에 불쑥 나타난다. '장외 거물'을 만나려면 조그만 코스닥 종목의 IR도 열심히 쫓아다니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떠올렸던 2009년 자문사 열풍 때 브레인과 쌍벽을 이뤘던 케이원투자자문의 권남학 대표.

권 대표는 한국투신운용 펀드매니저를 하다 조용히 자문사를 차리고, 성공했지만 튀지 않았던 몇 안 되는 인물이다. 케이원은 자문사의 색깔을 지킨 채, 지금도 2위로 아주 꾸준하게, 선전하고 있다.

그리고 시장을 보는 냉철한 시각은 여전하다. 권 대표에게 프리젠테이션을 다녀온 애널리스트들은 입을 모아 얘기한다. 권 대표의 질문에는 남다름이 있다고. 때론 송곳 같은 질문에 등에서 땀이 흐른다고도 한다.

권 대표는 "화장품, 삼성전자, 네이버 빼고는 10년 동안 오른 게 없다. 2007년 이후 소형주 31.4% 올랐고, 중형주 -8.8%, 대형주 -2.0%였다. 케이원은 트렌드를 선도하는 종목(시세가 가장 많이 난다, 저평가 종목, 이익이 꾸준히 성장하는 종목에 골고루 투자하고 있는데, 그런 의미로 투자한 두 종목은 사놓고 보니 답이 없다. 장기로 들고 있음 먹을 것 같아서 샀는데 15% 마이너스 났는데 언제 오를거냐에 답이 없더라"라로 했다.

그는 "작년에 먹은 걸 올해 뱉어냈지만, 장기로 가면 이길 것"이라면서도 "누적수익률로 보면 시장을 크게 이기고 있지만 고점 대비 많이 빠져서 요새 스트레스 받고 있다. 시장을 못이길거 같아서 그동안 쪽잠을 잤는데, 최근 한달 전부터 시장을 이길 것 같은 자신감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이길 거다"라고 했다.

[에피소드2] "돈이나 일로 얽히면 친구가 될 수 없어요. 그는 나의 좋은 친구인데, 지금은 좋은 친구지만, 같은 회사에서 하다 보면 많은 일들이 있겠지요. 좋은 동료로 남기 위해서는 동업을 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그래도 사모펀드나 헤지펀드가 하고 싶으면, 친구 말고 다른 방법으로 찾겠습니다"

서재형 전(前) 대신자산운용 대표는 케이클라비스에 합류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했다. 평소 그를 아는 지인이라면, 친구라는 말과 동업을 안해 본 것도 아닌만큼 친구라는 말의 무게를 안다. 특히 동업의 무게가 서 전 대표에게는 더욱이나 클 것이다.

서 전 대표의 구재상 케이클라비스 부회장의 만남은 여의도 금융투자업계의 화두였다. 왕년의 두 스타 중의 하나인 서 대표가 다른 스타 구 부회장이 오너로 있는 한진해운 빌딩에 몇 번 드나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여의도에 수많은 말들을 낳았다.

그 때마다 서 전 대표는 "아니다"고 했다. "정말 아니라"고.

그런데도 서 전 대표가 올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생각했다. 일각에서는 노욕(老慾)을 버리지 못할 것이라고.

서 전 대표는 "지금이 편안하다. 명함을 버리고 대신 얻은 자유는, 명함을 가지고 있을 때 얻었던 것보다 크다"고 말했다.

사실 구 부회장과 서 전 대표는 미래에셋이 컸기에 서로를 얘기할 수 있는 상대가 됐다. 미래에셋이라는 특히 서열이 분명한 회사에서 구 부회장은 CIO였고, 서 전 대표는 펀드 일부분을 책임지는 운용 파트의 본부장이었다. 적이라면 적이었다.

당시 구 부회장은 조금 과장하자면 국내 주식시장의 '큰 손' 국민연금 CIO보다 더 영향력이 막대한 '자본시장 대통령'으로 불렸다.

사람의 일이라는 게 그렇듯, 영원하지 않는 기세가 결국은 타이밍(시간) 싸움이라면 서 전 대표는 2009년에 역전을 했다.

하지만 서 전 대표는 역전을 했다. 회사를 먼저 나와 창업, 동업자와 함께 창의투자자문을 차렸다. 서 전 대표가 깃발을 꽂자, 투자자들은 그의 이름을 단숨에 알아봤다. 일주일 만에 1조원의 자금이 모였다. 하지만 그 때는 2007년 하반기. 코스피가 사상 처음으로 2,000선을 뚫었지만 이어진 금융 위기로 1년 만에 장은 고꾸라졌다. 혹독한 겨울이 계속됐다.

이후 서 전 대표는 구 부회장이 회사를 나와 혹독한 시기에 '자기 것'을 만들려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예전 직장 상사이자, 동료, 친구에게 충심을 다해 말했다. "하지 마시라고…"

경험이 쌓일수록 사람은 신중해진다. 그 경험이 혹독했다면 더욱 그럴 것 같다. 왕년 스타들의 결합이 성사되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서 전 대표가 창의투자자문이라는 회사를 만들었을 때, 그의 이름 값만으로도 1조원의 자금을 순식간에 모았다. "그가 깃발을 꽂자, 1주일만에 1조원의 자금이 몰렸다".

서 전 대표가 회사를 차렸을 때가 코스피가 미지의 땅을 밟았던 2007년 10~11월이었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여러가지 운이 있는데, 시운이 좋지 않았다"고 했을 법하다.

그는 혹독한 시간을 보냈다.

구 부회장이 회사를 나와서 '자기 것'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계급장 떼고 상사를 다시 만났을 때도 가장 많이 말렸다. "하지 말라고…"

돌고 돌아 다시 만날 수 있던 기회가 이번에는 성사되지 않았다. 신중해야 하니까.

과거의 마켓의 무버와, 현재의 마켓 무버, 그리고 언젠가 다가올 새로운 사람을 기다리는 미래의 마켓 무버. 증시는 60년을 맞이했고, 그럼에도 꾸준히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금융증권팀 차장)

sykwa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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