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다른 이의 처지를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결국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유대인 출신 작가 한나 아렌트가 쓴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한 구절. 나치전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사형판결 과정을 참관한 뒤 깨어있지 못한 엘리트들의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지 경고한 것이다. 전형적인 관료였던 아이히만은 상부의 지시를 따르는 게 너무 당연하며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그지시가 옳고 정당한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유대인을 대량학살했지만 "나는 주어진 직분에 충실했을 뿐이며 명령을 받은 대로 했을 뿐입니다"고 했다.

경제관료와 채권단의 최근 행보가 아이히만과 닮은 꼴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가계부채가 1천300조원 수준으로 늘고 한진해운이 공중분해됐지만 내 탓이 아니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어서다.

◇기준금리내리면서 LTV·DTI 완화한 경제관료들

박근혜 정부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를 내리도록 압박하면서 주택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까지 완화했다. 하우스푸어 지원 대책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긴 했다. 돈의 값이 싸지고 빌릴 수 있는 한도가 더 많아지니 가계의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거래 활성화를 명분으로 분양권 전매제한까지 완화했다. 강남을 중심으로 분양권 전매시장이 투전판 형태의 과열 양상을 보였고 아파트 가격까지 치솟았다.

가계부채가 1천300조원에 이르도록 부동산 정책을 오도한 경제관료들은 좋은 보직과 승진 기회를 꿰차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들은 상명하복에 길들어 옳고 그름을 사유하지 않았다. 부채 주도형 성장모델의 후유증에 대해 내 탓이라는 관료는 한 명도 없다. 초이노믹스의 후예인 관료들이 이제 책임회피에 급급한 것이다.

◇ 한진해운 구조조정한 채권단

1조3천억원 정도면 살릴 수 있었던 한진해운을 구조조정한 산업은행 등 채권단들도 아이히만과 닮은 꼴이다. 한진해운을 구조조정한 채권단 가운데 산업은행 경영진은 "나는 뱅커(은행원)로 정치적 판단이 아니라 엄정한 손실부담 원칙 등 구조조정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했다"고 강조했다.

금융전문가들은 정책금융 경영진으로서 자질이 의심되는 발언이라고 지적한다. 산업은행이 민간은행과 같은 잣대로 운영됐다면 현재의 위상과 달라졌을 것이란 이유에서다. 산은은 국가 신용이 뒷받침된 산금채를 바탕으로 지탱되는 정책금융기관이다. 결손이 있으면 매년 정부로부터 자본확충을 받는다. 수신기반도 없이 국가 신용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정책금융기관은 금융만이 아니라 산업정책 차원에서도 해당 사안을 다뤘어야 했다.

산은 경영진은 5조원을 넣고도 부실 투성이 돈 먹는 하마로 전락한 대우조선해양에 대해서는 법정관리행을 반대한다. 엄청난 후폭풍이 예상된다는 이유에서다. 한진해운을 처리할 때는 뱅커였다가 대우조선 처리할 때는 정책금융기관 경영진으로 변신한 꼴이다.(정책금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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