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정지서 기자 =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안전한 주택담보대출에 치중하는 은행들의 전당포식 영업에 강한 경고를 보내면서 어데어 터너 전 영국 금융감독청장의 저서를 거론하자 이 책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2015년에 출간된 '부채와 악마 사이(Between Debt and Devil): 돈, 신용, 그리고 국제금융 바로잡기'다.

국내에서는 아직 번역되지도 않은 이 책을 두고 은행권은 최 위원장의 속 뜻을 해석하느라 분주해졌다.

저자인 어데어 터너는 영국에서 손꼽히는 국제 경제ㆍ금융 전문가다.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실무형 관료'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컨설팅회사 맥킨지와 영국의 재계단체인 영국산업연맹(CBI) 대표, 메릴린치 유럽법인 부회장을 지냈고, 이후 임금위원회와 연금위원회 등 정부 산하 자문기관의 수장을 역임했다.

리먼사태가 들이닥친 2008년 9월에는 영국 금융감독청(FSA) 수장을 맡아 2013년 퇴임했다.

그는 곧장 '채권왕' 조지 소로스가 설립한 미국 경제 싱크탱크 INET에 영입돼 글로벌 금융위기의 원인과 대안을 연구했다.

최 위원장이 언급한 그의 저서 '부채와 악마 사이'는 바로 그 연구 결과물이다.

28일 금융권 등에 따르면 이 책은 은행의 무한정한 신용 공급이 금융 불안을 야기하면서 현대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손쉽게 얻는 대출은 집이 없는 젊은이들과 소외 계층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갈 수 있다고도 일갈했다.

터너는 '경제적 공해(economic pollution)'란 표현으로 부채 문제의 심각성을 꼬집기도 했다.

집과 차 안에서 냉난방 시스템을 이용하면 개인의 효용은 커지지만, 대기오염 같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 은행이 권하는 빚은 경제적 공해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최 위원장도 경제적 공해란 표현에 크게 공감했다.

그는 "우리 경제도 상당 부분 이에 부합한다"며 "은행의 무한한 신용 공급과 한정된 자산이 사회적으로 금융 불안을 야기할 수 있고 금융당국은 이런 부분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터너는 줄곧 국가의 부채를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해왔다.

그는 전 세계적으로 부채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것을 두고 '빚의 함정', '부채 과잉' 이라고 지적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금융회사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입장도 고수했다.

실제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했던 2008년 10월 터너는 "가벼운 규제의 시대는 갔다"며 런던의 금융회사에 경고장을 날렸다.

당시 그는 대형 은행에 대한 규제를 더 엄중하고 현명하게 바꿔 실제로 위험이 존재하는 곳에 규제의 초점을 둬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간 시장의 논리를 내세워 자율성에 기반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금융회사의 논리가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힘을 잃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당시 그의 주장대로 영국 금융당국은 금융위기 이후 금융상품 개발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거나 금융회사 내부 인센티브 시스템을 고치는 정책 등을 추진했다.

터너는 한 발 더 나아가 국제 외환거래에 1%의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골자로 한 '토빈세(tobin tax)'를 찬성하기도 했다.

은행의 잉여금에 대해 특별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금융부문 급속한 팽창을 제어해야 한다고 주장해 금융권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최 위원장과 터너는 민간과 관가를 두루 경험했다는 점에서 닮았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와 리먼사태 같은 심각한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대응책 마련에 분주했던 것도 비슷하다.

가계부채가 야기하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금융회사의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는 논리도 일치한다.

최 위원장은 은행이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산정할 때 적용하는 가계대출 위험가중치(Risk Weighted)를 조정할 것임을 시사했다.

은행이 기업 대출보다 안정적인 가계대출, 특히 주택담보대출에 치중하는 영업 행태를 바로잡고 중소기업 등 산업 전반에 자금이 공급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금융당국은 가계부채 대책의 큰 범위 안에서 은행의 건전성과 자본규제 전반을 꼼꼼히 들여다볼 계획이다.

단순히 규제 비율 조정을 떠나 산정 방식에 문제가 없는지, 다양한 자본규제가 빠질 수 있는 구성의 오류를 살펴보겠다는 얘기다.

은행의 가계대출 위험가중치 역시 하나의 예일 뿐, 전당포 식 영업 관행을 바꿔 수익을 다변화할 수 있도록 다양한 건전성 규제 전반을 재점검할 예정이다.

최 위원장의 '터너 식' 규제 추진 가능성에 은행들의 걱정은 커지고 있다.

최 위원장은 전일 카카오뱅크 출범식에 참석한 뒤 기자와 만나 "위험가중치를 포함해 여러 가지 방식을 고민 중"이라며 "방향만 말했을 뿐 구체적으로는 은행의 건전성 규제를 포함해 여러 가지 전반적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을 다 보겠다"고 말했다.

jsje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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