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정지서 기자 = #. 열병합사업을 운영하는 중소기업 A는 올해 초 300억 원 규모의 운영자금을 구하려고 은행 문을 두드렸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규모가 영세하다 보니 금리 등 조건에 맞는 대출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자금조달 고민이 깊어지던 찰나, 우리은행이 필요한 대출금 중 일부를 자기자본(PI)으로 투자하겠다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A는 회사 지분을 갖게 된 은행이 경영에 간섭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대형 시중은행이 주주가 되면 기업의 신뢰도를 올리고 좀 더 싼 조달금리로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는 매력이 컸다. A는 우리은행으로부터 220억 원의 대출과 65억 원의 투자를 받아 프로젝트 수행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다.

#. 중소 폐기물처리업체 B는 지난여름 우리은행 거래 영업점을 찾아 대출을 문의했다가 흥미로운 제안을 받았다. 일반 기업신용 대출이 아닌 영업점이 기업의 전환사채(CB)를 직접 인수해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얘기였다. 주식과 사채 중간 형태인 CB는 일정한 조건에 따라 발행 회사의 주식으로 전환될 권리가 있는 채권이다. 전환 전에는 채권으로서의 확정 이자를 받고, 전환 후에는 주식으로서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 통상 CB 발행 금리는 대출금리보다 1~2% 낮아 기업으로선 적은 비용으로 대출이 가능한 셈이었다. B사는 3억 원 규모의 3년 만기 CB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했다.

21일 금융권에 따르면 우리은행은 지난 6월 '영업점 소액 CB 인수제도'를 신설했다. 880개 전국 영업점이 투자자가 돼 중기ㆍ벤처기업에 10억 원까지 투자할 수 있는 제도다.

CB나 교환사채(EB), 신주인수권부사채(BW) 등 메자닌 금융은 기존 은행 IB 본부의 일반적인 금융지원 방식이다. 하지만 영업점이 직접 기업 투자의 주체가 되는 것은 시중은행 중 우리은행이 처음이다.

제도 시행 석 달째인 현재 우리은행은 창업 초기 업체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은 현장 영업점을 통해 기업의 자금 수요를 발굴하고 행 내 IB 본부와 심사부서와의 협업을 통해 투자 대상을 선별하고 있다.

앞으로는 창업 초기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스타트업 기업이나 혁신 기업을 대상으로 CB 인수를 늘릴 계획이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기업 입장에선 은행의 투자로 신용도를 개선, 가능한 여신 규모를 늘릴 수 있다"며 "CB 만기 이후 주식전환을 통해 자본 확충 효과도 거둘 수 있어 자금조달 이외 재무건전성의 효과까지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은행은 최근 대출 기업에 대한 자기자본(PI) 투자를 적극적으로 늘리고 있다. 영업점의 CB 인수는 이를 확대한 액션플랜 중 하나다.

대출 기업에 대한 직접 투자야말로 기업과 은행이 상생할 방안임을 강조한 이광구 행장의 특별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투자설명회(IR)를 위해 일본을 찾은 이 행장은 장기화한 저금리 기조 속에 수익을 남기는 비결을 현지 지점장에게 물었다. 대출금리가 1~1.5% 수준에 불과한 일본 시장에서 은행이 취득할 수 있는 금리는 0.3~0.5%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때 이 행장은 대출 신청 기업에 대한 PI 투자 사례를 처음으로 접했다. 만약 기업이 100억 원의 대출을 신청하면 이중 70억 원은 대출을, 30억 원은 직접 투자를 하는 방식으로 금리뿐만 아니라 배당 등의 자본 이익을 얻어 기대 수익을 올린다는 얘기였다.

일본 현지 지점장의 이야기는 이 행장에게 큰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중소기업은 우리은행이란 투자자를 얻은 평판을 높이고, 우리은행은 대출의 저마진과 자본 투자수익을 늘려 기업과 은행이 상생하는 방안이란 판단에서다.

이 행장은 즉시 대출 기업에 대한 PI 투자를 늘릴 방안을 마련할 것으로 IB 본부에 지시했다.

덕분에 한 중소 의류업체는 최근 우리은행에서 대출 240억 원을 실행하며 PI 투자 50억 원을 함께 받았다. 중소 전자장비업체 한 곳은 35억 원의 대출보다 더 큰 규모인 50억 원의 투자를 받는 데 성공했다.

전일 우리은행은 '더 큰 금융'을 선언했다. 그간 가계대출에 추진했던 보수적인 금융 관행을 개선하고 기업의 성장을 지원함으로써 생산적 금융을 강화하겠다는 뜻이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성장 잠재력 있는 중소 창업기업이 제도권 금융을 이용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에서 가장 큰 제약"이라며 "은행이 기업에 PI나 CB 인수 등 다양한 방식으로 모험자본을 공급한다면 사회적 가치를 많이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jsjeong@yna.co.kr

(끝)
저작권자 © 연합인포맥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