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국내 은행권 등 금융산업이 '규제포획(regulatory capture)의 덫'에 빠지고 있다. 금융당국이 은행산업 등에 대한 정부의 정당한 간섭을 관치라고 몰아세우는 여론의 눈치를 너무 살피면서다. 관치 논란으로 당국이 위축된 틈을 타서국내 은행업은 특정인맥이 경영권을 독차지하는 등 '그들만의 왕국'을 구축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대마불사를 바탕으로 과점적 지위를 누린 덕분이다. 대부분 은행들은 구제금융 등을 통해 살아남은 데 대한 사회적 책임감 등을 잊은 지 오래다.

'규제포획'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일해야 하는 규제기관이 피규제 기관에 의해 거꾸로 포획 당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정부 기관이 보호해야 할 공공의 이익을 희생해서 정작 규제해야 할 산업계를 보호하는 현상이다. 규제포획으로 해당 산업은 주주이익을 우선하는 경영행태를 보이기 쉽다. 종사자에 대한 처우 개선이나 일자리 창출 등 사회적 책임은 뒷전이다.

국내은행들은 안정적인 순이자마진(NIM)과과점적 지위를 누린 덕분에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은행의 순이자마진은 은행이 벌어들인 이자에서 지급한 이자를뺀 금액이다. 금융기관의매출액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은행업 경영 성과의 핵심 지표로 활용된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은행권의 상반기 순이자 이익은 17조5천676억원으로 전년동기 16조3천765억원 보다 7.3%나 늘어났다. 당기순이익은 7조5천720억원으로 전년동기 3조8천933억원보다 배 가까이 늘어났다. 해당 기간에 은행원 수는 11만1천420명으로 전년동기 대비 4천517명이 줄었다.

금융지주와 은행권의 주가는 급등했다. 각종 경영지표 호전에도 일자리를 늘리지 않아서다. 지난해 1월20일 371.43 수준이던 금융업종 지수는 지난 8월1일 553.60까지 치솟았다가 10일 현재 529를 중심으로 거래되고 있다. 은행업종 지수도 지난해 1월20일 187.94에서 대세 상승기로 접어들어 지난 7월26일 361.64로 고점을 찍고 이날 현재 332를 중심으로 거래되고 있다.







은행 등은과점체제를 통해 공기업에 상응하는지위를 누리면서도 기업대출을 늘리기보다는 담보 위주의 가계대출에만 치중하는 이른바 '전당포 영업'에 집중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내 은행의 전체 대출금 가운데 산업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8년에 72.3%에서 지난해56.6%까지 떨어졌다. 같은 기간 담보위주의가계대출 비율은 27.7%에서 43.4%로 치솟았다. 산업대출에서 부동산 및 임대업에 투입된 자금의 비율은 1998년 1.0%에 그쳤는데 2016년에는 18.5%를 기록하며 관련 통계 작성 후 최고치가 됐다.

은행권 경영진들이 관치에 대한 비난 여론을 방패막이로 담보위주의 '전당포 영업'에 나서면서 금융업 본분인 자금 중개 기능이 옅어진 결과다. 여론은 은행이 관치의 그늘에서 벗어나 경영지표가 호전됐다며 칭찬하지만 주주 이외에 그 과실을 맛본 이는 없다. 전당포식 영업으로 호전된 실적 뒤에 특정 인맥들의 은행 사유화라는 검은 그림자만 짙어졌다.

국내 은행들이 전당포식 영업에 치중하면서 폴 폴먼(Paul Polman) 유니레버 대표가 새삼 눈길을 끌고 있다. 세계 굴지의 회사인 유니레버를 이끌고 있는 폴 대표는 한때 성직자가 되려고 했던 인물이다. 별명도 '세인트 폴(St Paul)이다. 그는 "기업은 지속 가능한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다. 적정한 투자와 직원에 대한 공정한 성과 지급,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제품생산 등이 그 실천방안으로 제시됐다.

주주이익만 우선하는 '앵글로색슨 독트린'에 찌든 은행권 경영인들이 한 번쯤은 세인트 폴의 외침에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엄청난 돈을 남기면서도 청년들의 일자리를 만드는 데 인색한 은행권은 규제포획의 덫을 만들 뿐이다. (취재부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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