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이현정 기자 = 은행연합회가 채용비리 방지 차원에서 은행권 공동으로 신입 직원 채용 관련 모범규준(Best Practice)을 마련하기로 했지만 일정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금융당국의 기본 원칙과 은행의 자율성을 모두 고려해 절충안을 마련한다고 하지만 입장차가 워낙 커 공통 기준을 도출해내기가 사실상 어렵고, 법적 구속력이 없는 모범규준이 어느 정도까지 지켜질지 의문이어서 면피성 대책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7일 금융권에 따르면 시중은행들은 지난 연말 채용비리를 근절하기 위해 공동으로 적용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금융당국과 협의해 만들기로 합의하고 테스크포스(TF)를 구성하기로 했지만 두 달여가 지나기까지 아무런 논의를 하지 않고 있다.

김태영 은행연합회장도 전일 기자간담회에서 "채용절차를 공정하고 투명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은행권 공동으로 모범규준을 만들보 볼까 생각하고 있다"며 "검찰의 수사 결과가 나온 후에야 진행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들이 금감원의 채용비리 조사 결과를 전면 부인하면서 당국과 은행 간 진실공방 양상으로 번지자 검찰 수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은행연합회 관계자는 "당국과 일부 은행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누구도 모범규준 마련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분위기가 됐다"며 "검찰에서 진위가 밝혀진 뒤에야 (당국과 은행 중) 어느 한 곳이 주도권을 잡고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은행의 경우 채용비리 수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약 3개월이 걸렸다. 이광구 행장은 도의적은 책임을 지고 물러난 뒤에도 여전히 개인 자격으로 법정 다툼 중이다.

이번 KB국민·KEB하나은행의 채용비리 건의 경우 사안이 더 크고 부정 청탁자에 대한 의혹 등이 여전히 남아있어 검찰 수사에 시간이 더 오래 걸릴 수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검찰 수사 결과가 나온다 하더라도 당국과 은행의 수장이 바뀌는 등 어느 한 쪽이 크게 흔들릴 수 있어 내부 수습에 시급해질 것"이라며 "지루한 법정 공방이 이어질 수 있어 모범규준 마련이 뒷전으로 밀려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은행권의 각기 다른 채용 기준과 시스템을 어느 정도 규율화 할 것인지도 의문이다.

예를 들어 국민·하나·농협·기업은행 등은 신입 행원 서류전형 후 필기시험을 보지만 우리·신한은행은 서류전형과 면접으로만 구성돼 있다.

블라인드 전형도 은행마다 적용 기준이나 방식이 다르다.

KEB하나은행은 서류전형에서 학교와 이름 등을 블라인드 처리하고 자기소개서로만 평가한다. 우리은행은 사진·이름·생년월일·대외활동 ·자기소개를, 기업은행은 지원분야, 성명, 주소 정도만 보고 걸러내는 등 은행마다 기재 항목이 다르다.

또 KEB하나은행은 이번 금감원 검사에서 글로벌 인재 우대와 입점 대학·주거래대학 출신자 우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일부 은행 2곳은 내규에 공개채용 필기시험에서 임직원 자녀에 가산점 15%를 부여하는 등 은행별로 비공식적 내부 우대 기준이 따로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은행이 아무리 공공기관 성격이 강하다지만 이 같은 민간 금융회사의 재량 영역을 금융당국이 어느 정도까지 손댈 수 있느냐도 미지수다.

김태영 회장도 "모범규준은 각 은행 신입 행원 채용의 다양성과 유연성, 자율성까지 고려해야 할 것"이라면서도 "국내 은행의 경우 공공기관 성격이 강해 원칙대로 가야 한다는 분위기도 있어 이런 부분이 (당국과) 협의가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들은 모범규준 마련 TF가 꾸려지기도 전에 회의적인 분위기다.

채용비리가 일반 직원들이 저지르기보다 최고경영자(CEO) 등 윗선에서 음성적으로 이뤄져 오던 일인데 모범규준을 만든다고 해서 얼마나 현실적으로 적용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특히 모범규준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자율 규제 성격이 가이드라인으로, 은행들이 지키지 않아도 처벌할 방법이 없다. 강제력이 없다 보니 향후 비슷한 사태가 벌어졌을 때 책임을 묻기 위한 근거로 사용될 수 없어 실효성이 없다는 얘기다.

한편으로는 모범규준이 명시적인 법규는 아니지만, 금융사를 옥죌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림자 규제 관행을 지양하겠다는 당국의 정책 방향에도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시중은행 인사부 관계자는 "채용비리를 방지하기 위해 모범규준을 만든다지만 모든 은행에 적용 가능한 수준이라면 선언적 의미에 그칠 것"이라며 "보여주기식 제도를 만들기 이전에 원인부터 제대로 진단하고, 은행들의 자체적인 정화 노력이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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