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무역의 어젠다는 미국이 그동안 지속해서 추진해 온 중요한 정책 중 하나다. '자유' 무역을 통해 제품과 서비스가 국가 간에 '자유롭게' 거래되고 환율 또한 '자유롭게' 변동되면서 지나친 흑자나 적자가 나지 않도록 조정되는 메커니즘은 글로벌 경제 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글로벌 금융 결제 체제이다. 1944년 이후 미국은 글로벌 결제 통화 발행국, 즉 기축통화의 발행국 지위를 확보하였다. 소위 브레턴우즈 시스템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 체제는 1971년 미국이 달러의 금 태환 보장을 정지하면서 붕괴하였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는 계속 유지되었다. 금 태환 보장의 약속은 없어졌지만 달러는 계속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한 것이다. 따라서 브레턴우즈 체제는 붕괴한 것이라기보다는 버전 1.0에서 2.0으로 이행했다는 평가가 더 설득력이 있다.

계속 유지되고 있는 이 체제에서 미국의 무역적자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미국이 무역적자를 기록하면 적자만큼의 달러가 다른 나라에 지급된다. 달러가 글로벌 경제로 유입되는 것이다. 글로벌 통화에 대한 유동성이 제공되고 제삼자들끼리 이 달러를 사용하여 무역결제가 이루어진다. 미국의 무역적자는 곧 글로벌 기축통화의 발행 통로이다.

미국은 1980년대부터 대외적 흑자를 기록한 적이 사실상 없다. (한 해만 예외였다) 지속해서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하면서 글로벌 경제에 기축통화를 공급한 것이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 미국의 적자 폭이 8천억 달러에 달한 적이 있었고 당시 중국의 대미흑자는 2천억 달러 수준을 기록하면서 미국의 지나친 적자와 중국의 지나친 흑자가 소위 '글로벌 임밸런스' 현상으로 명명된 적도 있다. 당시 글로벌 경제에 달러 유동성이 엄청나게 증가하면서 세계 경제는 호황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곧이어 서브프라임 위기가 터지고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였고 그 이후 10여 년에 걸친 위기 국면이 이어졌다. 글로벌 임밸런스가 글로벌 금융위기의 원인 중 하나라는 진단도 나왔다.

흥미로운 것은 미국에서 위기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달러의 지위는 흔들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2009년 초 중국의 중앙은행 총재가 달러 대신 IMF가 발행하는 SDR을 기축통화로 사용하자는 주장을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변화는 없었다. 미국에서 위기가 발생한 이후 글로벌 경제 내에 소위 '안전자산으로의 도피(Flight to Haven)' 현상이 나타났었다. 그런데 달러는 안전자산으로 평가되면서 달러 표시 자산으로 투자가 몰렸다. 미국에서 위기가 발생했지만, 미국이 발행하는 돈은 안전자산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이처럼 달러의 위력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는 느낌이다.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 미국의 입장에 상당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에 대해 무역흑자를 기록하는 나라는 돈만 벌면서 미국을 이용만 하는 나쁜 나라들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는 한때 트위터 메시지에 "나는 중국에 대해 매우 실망하고 있다. 우리의 '바보 같은' 과거 지도자들은 중국이 미국에 대해 수천억 달러를 벌어가도록 허용했다"는 글을 남긴 적이 있다. 중국이 막대한 대미흑자를 통해 달러를 벌어서 경제력을 축적한 후 이를 가지고 군사력을 증대시켜 미국을 제압하려 들 것이라는 피터 나바로 교수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은 백악관에 있는 피터 나바로 교수는 “중국에 의한 죽음”이라는 저서에서 이러한 주장을 펼친 바 있다. 이제 자유무역을 주장하면서 대미흑자를 기록하는 국가들은 미국의 일자리와 달러를 빼앗아 가는 도둑들인 셈이다.

하지만 여전히 달러를 확보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달러 유동성이 부족해지면서 외환위기를 당하고 이로 인해 발생한 지독한 경제위기를 경험한 지 불과 20여 년 밖에 되지 않는다. 달러 유동성이 부족하면 어느 정도로 힘들어지는지 직접 체험을 한 바 있는 것이다. 경제성장률 -5.7%, 실업자 숫자 140만, 코스피지수 280이라는 숫자들은 달러 유동성 부족으로 인해 우리가 당해야 했던 설움과 비애를 잘 보여준다.

미국에 대해 흑자를 기록하는 주요국들은 중국 일본 독일 그리고 우리나라 등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대미흑자는 안보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안보에는 군사적 안보도 있지만, 경제안보도 있다. 경제위기를 당하면 군사적으로도 취약해진다. 과거 우리나라가 위기를 당했을 때 미국이 IMF를 통한 지원을 신속하게 결정한 배경에는 대한민국이 위기를 당하면 국방력이 취약해지면서 주한 미군의 안전이 침해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한 고려 대상이었다. 2008년 글로벌 위기 당시 해외자본이 급격히 유출되면서 우리의 외환보유고가 2천700억 달러에서 2천억 달러로 줄어들었을 때 우리 정부는 미국과 300억 달러의 통화스와프 계약을 체결하였고 이 계약이 체결되는 즉시 외환시장이 안정되면서 사실상 위기 국면을 잘 피해갈 수 있었다. 2천억 달러의 외환보유고가 있었지만, 미국이 제공하는 300억 달러가 훨씬 위력이 컸다. 미국의 도움을 통해 위기를 사전에 막아낼 수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보면 최근 우리 정부의 움직임은 매우 걱정스러운 면이 있다. 사드와 통상마찰 등의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중국과는 가까워지고 미국과의 거리는 소원해지는 모습이다. 하지만 중국 위안화는 기축통화가 되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다. 기축통화 발행국인 미국과 FTA를 맺은 것은 우리가 미국의 국익에 매우 중요한 국가라는 점을 확인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핵미사일의 사정권에 미국까지 포함하고 있는 북한의 핵 위협을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한미 공조는 매우 중요하다. 특히 자유무역의 결과로 나타나는 무역수지흑자가 비기축통화국인 우리나라에게 경제위기를 피해가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점을 미국에 주지시키면서 최대한 협조적으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대화는 북한하고만 할 것이 아니라 미국과도 보다 심도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소원해지고 있는 듯한 한미관계를 정치 외교적인 측면은 물론 경제 통상적 측면에서도 잘 풀어가야 할 때이다.(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 / 前 한국금융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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