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이현정 기자 = 금융감독원이 정상적 가상화폐 거래 지원에 나서겠다고 밝혔지만, 거래실명 시스템을 갖춘 시중은행들이 여전히 실명계좌 제공을 꺼려하고 있다.

가상화폐를 둘러싼 논란이 여전하고, 정부의 명확한 입장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인 데다 가상화폐 거래에 따른 자금세탁 가능성과 그에 대한 리스크를 져야 하는 등의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28일 금융권에 따르면 국민은행과 하나은행은 가상화폐 거래와 관련한 실명거래 시스템을 구축했지만 여전히 가상계좌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거래소와 계좌 제공과 관련한 논의를 진행 중이지만 구체적으로 결정된 것은 없고,신중히 보고 있다"며 "자금세탁이나 투자자보호 등 위험요인 등이 어느 정도 제거돼야 계좌제공이 가능할 것이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실명 확인을 통해 계좌를 제공하더라도 이는 중소기업에 담보 없이 대출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자는 심정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하나은행 관계자도 "거래 시스템에 대한 리스크가 여전해 계좌 제공과 관련해서는 아직 살펴볼 것들이 많다"며 "계약을 언급할 정도로 단계가 진행된 것은 없다"고 전했다.

현재 가상화폐 실명거래 시스템을 갖춘 곳은 국민·IBK기업·NH농협·신한·하나·광주은행 등 6개 은행이다. 이 중 가상화폐 거래소와 계약을 맺고 계좌를 제공하는 곳은 기업·농협은행, 신한은행 등 3곳뿐이다.더욱이 은행과 계약을 맺은 가상화폐 거래소는 업비트와 빗썸, 코인원, 코빗 등 단 4곳에 불과하다.

블록체인협회 소속 나머지 30개 가상화폐 거래소는 은행으로부터 가상계좌를 발급받지 못해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다.

은행이 실명확인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도 거래소에 계좌 제공을 주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가상화폐에 대한 정부의 불명확한 입장이다.

최흥식 금융감독원장은 지난해 12월 송년 기자간담회에서 "가상화폐 거품은 나중에 확 빠질 것이다. 내기해도 좋다"고 말했다가, 최근 신년 기자간담회에선 "정상 거래이면서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는 가상화폐 거래라면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 국민은행과 하나은행이 새 가상계좌를 제공하도록 독려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금융감독당국의 수장이 두달 새 말을 확 바꾸면서 도대체 당국의 입장은 무엇이냐는 의구심도 일었다.

홍남기 국무조정실장도 27일 국회 정무위원회에 출석해 "가상화폐 문제는 한쪽으로 결론을 내기에는 충분히 정부부처 내 협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은행들은 거래 실명제를 실시하면서 가상화폐 투기거래를 차단하는 효과가 생겼지만, 정부에서 확실한 가이드라인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금융당국의 말만 믿고 가상화폐 거래를 시작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가상화폐 콘트롤타워가 금융위가 아닌 국무조정실인데 위에서 입장이 바뀌면 금융당국도 또 말이 바뀔 것"이라며 "다른 은행들도 최 원장의 최근 발언에도 반신반의 눈치"라고 말했다.

그는 "당국이 은행이 자율적으로 결정할 사항이라고 한 만큼 향후 문제가 생겼을 때 짊어질 리스크가 너무 크다"며 "가상화폐 거래로 얻는 수수료 이익보다 관리 비용이 더 들어가는 실정"이라고 덧붙였다.

가상화폐에 대한 사회적 여론도 은행들에겐 부담으로 작용한다.

여전히 가상통화를 제도권 화폐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아닌 데다, 전 세계적으로 가상화폐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는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국제사회가 뚜렷한 가상통화 규제를 제시하지 않으면 EU가 나서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일본도 신규 가상화폐 공개(ICO·Initial Coin Offering)를 규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가상화폐 문제를 초기에 투기라 단정 짓고 강하게 규제를 밀어붙이지 못해 지금의 혼란을 자초했다"며 "금융회사가 자금세탁의 통로로 악용될 가능성을 차단해주지 않는다면 은행들은 소극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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