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버나드 쇼의 묘비에 있는 글귀이다. 극작가, 소설가, 사회운동가로 누구보다 열심히 살다 간 사람이 남긴 역설적인 충고이다. 사진이 귀했던 어린 시절, 마을에는 노란 코닥 마크를 붙인 사진관이 있었다. 코닥은 필름 생산의 세계 최강자였고, 절대로 내려오지 않을 지존으로 여겨졌다. 지존이던 코닥도 디지털 파도를 넘지 못했다. 세계 필름시장이 연간 20~30% 감소하면서 코닥은 허약해졌고, 몇 년 지나지 않아 파산했다. 잠시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디지털카메라가 코닥을 삼켜 버렸다.

오늘날 4차 산업혁명은 기업의 변화와 혁신뿐만 아니라 흥망을 좌우하고 있다. 온라인 서점에서 출발한 아마존은 이제 유통부터 콘텐츠와 클라우드 서비스까지 제공하는 거대 기업이 되었다. 호텔을 소유하지 않은 에어비앤비가 세계 최대의 숙박업체이다. 페이스북은 매체가 없는 미디어 그룹이 되었고, 알리바바와 텐센트는 인터넷 플랫폼 기반의 세계적인 종합물산회사가 되었다. 불과 10여 년 만의 대변화에 놀라울 따름이다. 더욱이 그 속도와 크기를 예측하기 어려워 두렵기조차 하다.

금융보험업도 예외일 수 없다. 전통적으로 금융보험업은 사람과 종이가 있으면 되는 인지(人紙) 산업이었다. 물론 금융상품이 복잡해지고, 거래 건수가 많아짐에 따라 전산이 이용되고 있지만, 주된 금융업무의 보조 수단에 머물렀다. 하지만 오늘날 기술(technology)은 업무 효율제고를 넘어 금융보험업의 콘텐츠까지 결정하고 있다. 핀테크와 인슈테크를 활용하여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금융상품과 서비스를 소비자에 제공하고 있다. 하루의 운동량을 착용 가능한 첨단기계로 측정하여 보험료를 할인해 주는 보험상품이 그 예이다. 이제 금융보험업은 인지 산업이 아니라 인술(人術) 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우리나라 금융보험산업도 발 빠르게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해 왔다. 핀테크 센터 창립, 핀테크 데모 데이 개최, 기술 발전에 상응하는 규제 개혁 등 쉼 없이 달렸다. 하지만 문제는 그 속도이다. 우리가 달리는 사이에 세계는 날고 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올해 창사 30년을 맞은 중국의 한 보험그룹을 예로 들어 보자. 이 보험그룹은 IT 기업을 자신의 경쟁자로 삼고, 전 세계 소비자와 기업을 상대로 한 '금융 솔루션 제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빅 데이터 분석과 인공지능 등의 연구개발비로 매출액의 1%, 연구 인력을 2만 명 이상 쏟아 붓고 있다. 금융회사가 아니라 제조회사로 착각할 지경이다. 세계 최고의 인공지능기업은 미국 아마존이 아니라 중국 기업이라는 보도가 과장이 아니다.

전통적인 IT 강국인 미국의 변신은 말할 것도 없다. 한 신생보험회사는 눈 깜짝하는 사이에 주택보험금 청구업무를 처리한다. 보험사고가 발생하면 영상통화 등을 통해 보험금을 청구받고, 빠르면 3초 이내에 보험금을 지급한다. 보험금 청구의 허위 여부를 확인하는 약 20개의 사기방지 알고리즘, 인공지능 덕택이다.

우리나라에서 핀테크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2014년 경이었다. 3년이 지난 지금, 우리 핀테크의 현주소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코닥과 같은 슬픔이 우리 금융업에 닥칠 수 있다. 우리 금융도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한 노력을 할 만큼 했다고 항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걸로 부족하다. 코닥도 세계 최초로 디지털카메라를 만드는 등 나름 대응을 했지만, 후지필름보다는 부족했다. 필름계의 만년 2인자였던 후지필름은 총이익의 60%를 차지하던 핵심부서인 필름 부분을 과감하게 정리했다. 필름사업에서 얻은 원천기술을 바탕으로 의약품, 화장품 사업 등을 중심으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여 후지필름은 생존했다.

과연 금융업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어떻게 생존하고 발전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우리가 잘하고 있다는 착각에서 깨어나야 한다. 이제라도 세계의 최신 과학기술과 아이디어가 모이는 곳에 가서 보고 배워야 한다. 일본의 손해보험회사는 실리콘밸리에 디지털 연구소를 설치하고 매일 쏟아져 나오는 기술을 습득하고 있다. 세계 7위의 보험대국인 우리 보험이 기술 강국에 디지털 연구소를 하나라도 설치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더 중요한 것은 '해 봤는데 안 되더라' 라는 생각을 떨쳐 버려야 한다. 지금 기술로는 구현하기 어려운 서비스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알파고’를 보라. 알파고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는 이세돌 9단 만큼 바둑을 잘 두지는 못했다. 2년이 지난 지금, 알파고는 세계 최강의 바둑 기사가 되었다.

때로는 4차 산업혁명을 외면하고 싶다. 외면하고 지금과 같이 살고 싶다. 하지만 내가 외면하더라도 누군가는 하기 때문에 외면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다. 우물쭈물하다가 이 꼴이 됐다는 변명을 준비하기보다 발 빠른 실패를 자주 경험해 보았으면 좋겠다. (성대규 보험개발원장/前 금융위 공적자금관리위원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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