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고유권 기자 =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지난 4일 보고서를 통해 '최저임금 속도 조절론'을 공식적으로 제기한 이후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

문재인 정부의 핵심 경제정책인 소득주도 성장과 일자리 창출의 대전제가 되는 정책이자 공약이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 원 달성'이라는 점에서 국책 연구기관이 '완곡한 반기'를 든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달 31일 청와대에서 열린 재정전략회의에서 문 대통령이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부작용이 있다면 대책을 마련하겠다면서도 기존의 정책 궤도를 수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상황에서 KDI가 이를 반박한 셈이 됐다.

경제 콘트롤타워의 양대 축인 청와대와 기획재정부의 또 다른 갈등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예기치 못한 곳에서 KDI 보고서를 반박하는 의견이 제기되면서 논쟁은 더욱 가열되고 있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국제노동기구(ILO)에서 고용정책국장이 된 이상헌 박사가 KDI의 분석을정면으로 반박하는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리면서 최저임금 속도 조절론을 둘러싼 대리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상헌 박사는 4일(현지시간) 올린 글에서 KDI의 보고서에 대해 '정확하지도, 적절하지도 않은 외국의 수치를 끌어다가 이미 결론을 내놓은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편의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일갈했다.

그는 "KDI의 분석은 그런 점에서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다"고도 지적했다.

이 박사가 지적한 것은 크게 세 가지다.

그는 우선 KDI의 분석은 한국의 사정을 분석한 것이 아니라고 꼬집었다.

그는 "미국과 헝가리의 최저임금 고용 탄력성 추정치를 가져다가 한국의 사례를 짐작했다"고 지적했다.

KDI가 최저임금 인상이 실제로 고용을 감소시키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미국과 헝가리 사례를 든 것을 비판한 것이다.

KDI는 올해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고용감소 효과가 하한 3만6천 명, 상한 8만4천 명이라고 추정했다.

이는 각각 -0.015(미국)와 -0.035(헝가리)인 임금 근로자 고용의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탄력성을 끌어와 추정한 수치였다.

이 박사는 이에 대해 "최저임금 효과가 노동시장 사정이나 구조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고용 탄력성이 국가별로 상이하다"고 지적했다.

나라별로 다른 사정을 현재의 우리 상황에 대입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라는 것이다.

이 박사는 또 KDI가 사용한 미국과 헝가리의 탄력성 수치마저도 편의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미국의 추정치는 1970∼1980년대의 옛날 것이고 KDI도 인정했듯이 이후 추정치는 0에 가까워 전체적인 고용감소 효과는 없는데도 이 추정치를 사용한 것은 최저임금의 부정적 효과를 전제하고 분석했다는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이어 "최저임금 속도가 빨리 올랐다는 이유로 헝가리를 봤지만 사실상 최저임금의 상대 수준이 비슷하고 고용감소 효과가 없는 영국의 탄력성은 사용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 박사는 최저임금 인상이 노동시장의 임금 질서를 교란한 수 있다는 KDI의 분석에 대해서도 비판의 날을 세웠다.

KDI는 최저임금이 2005년 임금 중간값 60%에 도달한 이후 프랑스 정부가 추가 인상을 멈춘 이유가 임금 질서의 교란 때문이라고 봤다.

그러면서 최저임금이 계속 인상되면 득보다 실이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이상헌 박사는 "이조차도 정확하지 않다"고 일갈했다.

그는 "KDI가 주목한 2000년대의 최저임금 인상은 프랑스가 35시간으로 노동시간을 줄이면서 불가피하게 시간당 임금을 조정하면서 생긴 일"이라며 "너무 급작스럽게 최저임금을 올려서 생긴 부작용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이상헌 박사는 KDI의 보고서에 대해 "분석보다는 용기가 더 돋보인다"고 꼬집고, "한 나라의 경제부처 수장이 침묵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온갖 잘난 척하면서도 정작 어설픈 우리 시대의 자화상일 것"이라며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입장 표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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