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금융과 신뢰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금융업에서 신뢰는 그 어느 산업에서보다도 중요한 기초자산이고 핵심가치이다.

몇 가지 사례를 보자. 은행권에서는 일부 은행의 부당한 대출금리 산정이 문젯거리가 되고 있다. 자본시장에서는 지난번 주식배당사고에 이어 주식병합에 관한 처리가 잘못되어 투자자와 분쟁이 발생하였다는 보도가 있었다. 보험회사들은 얼마 전 자살보험금 사태에 이어 즉시연금의 미지급금이 문제 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금융상품의 가격 결정 시스템, 증권거래시스템, 보험금지급시스템이라는 금융거래 인프라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금리가 자유화된 이후 개별 차주에 대한 구체적인 금리산정은 개별 은행의 몫이다. 이번 사태는 담당 직원들의 실수이지 의도된 결과는 아니라는 설명도 들린다. 그러나 대출이자와 같은 금융상품의 가격은 대출이나 예금을 포함한 금융거래를 위한 기초정보라는 점에서 사소한 오류도 용납되지 않아야 한다. 담당 직원의 실수라 해도 많은 의심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투자자들의 입장에서 증권거래시스템은 관심 분야가 아니다. 사실 블랙박스라는 표현이 있듯이 전문가가 아니면 쉽게 알기도 어려운 분야이다. 투자자들은 제공된 시스템에서 증권을 매매하고 증권이나 대금을 수취하는 것뿐이다. 증권사를 포함한 증권거래시스템에 참여하는 기관 간에 논란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투자자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뿐이다. 마찬가지로 즉시연금 등에 대해서는 개별 사안별로 당사자 사이에 상반되는 주장이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보험가입자의 경우 보험사에서 산출하여 통보해준 보험금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만큼 금융소비자들의 은행이나 증권사 또는 보험사가 제공하는 정보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러한 의존에 신뢰가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금융거래는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법적 관점에서 어떻게 볼 것인지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본다.

첫째, 대출이자의 부당한 산정과 부과를 방지하기 위해 부당한 금리산정이나 부과를 제재하거나 금리산출의 근거와 내용에 대한 공시의무를 강화하는 내용의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어 있다. 금리규제에 대해서는 금리의 산출 및 부과의 정확성을 강조하는 입장과 공시를 강조하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금리를 포함한 금융상품의 가격 규제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공시 주의에서 나아가 가격 결정체계의 정확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이 적절한 입법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원칙에 따르면서 한 걸음 나아가 예금이나 대출, 증권, 파생상품, 보험상품 등 모든 금융상품거래와 관련하여 금융회사에 의한 부당한 가격산정이나 부과 등을 불공정금융거래행위로 처벌하는 포괄적인 접근이 시도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특히 증권거래시스템과 같은 금융시스템을 설계할 때 고려할 사항으로는 우선 효율성과 안전성의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효율성은 경제적인 의미에서의 비용 효율성을 의미한다. 금융도 그 자체 비용과 수익을 판단해야 하는 산업이기 때문에 효율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금융거래가 가지는 사회경제적 효과 특히 금융소비자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안전성에 대한 고려가 적어도 효율성과 비슷한 정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맞다. 이러한 고려는 자금이나 증권 또는 파생상품의 청산결제시스템과 같은 기본인프라뿐만 아니라 개별 금융회사의 내부시스템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문제는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온다. 금융과 신뢰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이와 관련해 현재까지의 법률은 금융회사의 금융소비자보호의무를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형태와 내용으로 규정하고, 주로 금융회사의 내부통제와 준법감시를 포함한 내부역량을 통하여 이를 구현하려는 방향으로 만들어지고 해석ㆍ운용돼왔다.

금융에 대한 신뢰의 위기는 이러한 입법과 해석방향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 예컨대 금융상품에 대한 제조규제를 도입하고 판매 과정에서의 규제준수에 대한 증명책임을 금융회사로 전환하자는 등의 주장이 그것이다. 부당금리 등의 사례는 금융과 신뢰에 대한 전통적인 입법모델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지에 대한 평가의 기회가 될 것이다. (정순섭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 / 前 금융위원회 비상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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