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전격적인 3차 양적완화(QE3)를 발표했다. 앞으로 연준은 매달 400억달러의 주택저당증권(MBS)을 매입한다. 오퍼레이션 트위스트로 매입하는 장기채권 매수물량(월 450억달러)을 합치면 연준이 매월 사들이는 채권(국채.MBS)의 양은 850억달러가 된다.

이에 앞서 유럽중앙은행(ECB)은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 재정부실국가의 국채를 무제한 매입하겠다고 발표했다. ECB는 유럽 부실국가의 국채 1~3년물을 집중 매입하게 된다.

미국과 유럽 중앙은행의 정책엔 공통점이 있다. 이른바 '오픈 엔드(Open-ended)'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오픈 엔드는 글자 그대로 끝을 열어둔다는 뜻으로 채권 매입의 총액을 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연준은 매월 850억달러를 매입하는 프로그램을 가동하지만 이 프로그램의 종료시점을 명시하지 않았다. 경기부양책을 무기한 쓰겠다는 의미다.

이를 두고 일부 전문가들은 '무한대 양적완화(QE Infinity)'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과거 1~2차 양적완화 때 연준이 종료 시점과 양을 한정한 것과는 분명히 비교된다.

오픈 엔드라는 개념을 Fed보다 먼저 도입한 곳은 ECB다. ECB는 연준보다 1주일 앞서 열린 회의에서 부실국가의 국채를 무제한(open-ended) 매입하겠다고 했다. Fed가 정한 '오픈 엔드'는 ECB 모델을 따라한 것이다.



# 오픈 엔드는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경제가 살아날 때까지 정책 당국이 무한대로 돈을 뿌리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2008년 발생한 금융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해법은 부채를 줄이는 것이었다. 구조조정으로 몸집을 줄이고 빚으로 성장했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게 급선무였다. 그러나 부채를 줄이는 것만으로는 위기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궁극적으로는 경제가 성장해야 금융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 경제가 성장하는 상황에서는 부채가 많은 게 별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 정치인과 당국자들은 올해 들어서 이를 깨닫기 시작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경제성장을 강조한 건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성장을 통한 위기해결을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연준과 ECB가 헬리콥터에서 무제한적으로 돈을 살포하기로 한 건 미국과 유럽 경제가 성장할 때까지 후방에서 제대로 지원하겠다는 뜻을 담은 셈이다. 중앙은행이 돈을 뿌리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게 인플레이션 문제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부채문제를 해결하는데 일정 부분 도움이 된다.

지금은 인플레이션보다 디플레이션이 문제다. 경제가 침체에 빠지고 일자리가 없어지는 게 더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연준이 고용과 인플레이션 방어라는 두 가지 책무에서 고용을 선택하고 인플레이션을 사실상 방치한 배경이다.



#오픈 엔드가 갖는 두 번째 시사점은 자본주의 철학의 변화다. 미국과 유럽의 무제한 돈살포는 과거 중앙은행에서는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과거 패러다임에서 중앙은행의 책무는 경제성장보다는 물가안정이었다. 중앙은행이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중앙은행의 개입이 정치권의 요구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중앙은행 독립성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일이다. ECB 결정의 배후엔 프랑스와 스페인, 이탈리아 등 경제지원책이 절실한 나라 정치인들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다. 연준의 양적완화는 민주당 정권 재창출용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공화당은 이런 이유로 연준의 3차 양적완화를 결사반대했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개입을 독립성 훼손이라는 측면에서 보기보다는 새로운 자본주의 모델을 만든다는 시각으로 볼 필요도 있다.

정치권과 정부, 중앙은행이 과거에는 서로 견제하면서 발전하는 모델이었다면 이제는 서로 합심하고 협력하면서 위기를 벗어나는 모델로 변신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장(기업)과 정부도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협조하는 관계를 모색할 수 있다. 시장경제를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새로운 자본주의 모델이 떠오를 때가 된 것이다.

아나톨 칼레츠키가 지은 『자본주의 4.0』에 따르면 인류는 그동안 시장의 실패를 보기도 했고 정부의 실패를 보기도 했다. 시장과 정부는 모두 불완전하며 오류를 저지르기도 쉽다. 결국 새로운 자본주의 모델은 시장과 정부가 대립관계가 아닌 동반자 관계가 되는 혼합경제가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미국과 유럽이 내놓은 통화정책 결정 과정과 성공 여부는 새로운 자본주의 모델을 시험하는 단초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국제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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