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600조원 규모의 국내 펀드시장이 기준가 산정 오류의 위험에 노출되고 있다. 펀드의 기준가를 산정하는 일반사무관리회사 종사자들이 과도한 업무 강도를 견디지 못하고 속속 이탈하고 있어서다.

일반사무관리회사 종사자는 채권과 주식 등 펀드에 편입되는 자산의 종가를 취합해서 기준가를 산정하는 펀드산업의 인프라를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이틀에 하루꼴로 새벽 2시까지 야근을 해야 하는 등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는 금융산업의 대표적인 '을'이다.

◇퇴사율 35%의 살인적인 노동강도

이른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의미인 'Work-life balance'의 준말)과 거리가 먼 노동 강도 탓에 2016년 한 해 동안 기준가 산정 업무 담당직원의 퇴사율이 무려 35%에 달했다. 1년을 못 버티고 회사를 떠나는 신입직원도 3명 중 1명꼴이다.

일반사무관리회사가 만성적인 인력난에 허덕이면서 기준가격 오류도 큰 폭으로 늘었다. 관련 업계 등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가 오류 공시 건수도 711건으로 1년 전보다 무려 253%나 급증했다. 펀드 기준가격은 말 그대로 펀드를 사고 팔 때 기준이 되는 가격이다. 기준 가격이 잘못 산정되면 펀드는 잘못된 가격으로 거래가 성사되는 등 금융시장에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기준가 산정을 위해 금융공학적 노하우가 뒷받침되는 고급 인력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력있는 일반사무관리회사 종사자들은 높은 연봉에도 기회만 있으면 회사를 떠난다. 늘 칼날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업무 스트레스에도 자존감을 찾을 수 없어서다.



◇해외펀드비중 확대로 종가 취합 더 늦어져

기준가 산정 오류가 곧 펀드가입자들의 이해와 직결되지만, 원자재에 해당하는 종가 처리는 갈수록 늦어지고 있다. 홍콩 등의 자산을 편입하는 해외펀드가 늘어났기 때문이다.최근 자산운용사들이 홍콩의 선물 등을 이용한 거래 패턴을 늘리면서 종가 취합은 오후 8시 이후로 늦춰지는 게 다반사다. 국내 자산운용사의 홍콩 선물거래량만 월 18조원 규모를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

자산운용사의 운용내역과 펀드편입 내역에 뒤늦게 취합한 종가를 적용시켜야 펀드기준가격이 산정된다. 각종 전산 장치를 총동원해도 자정을 훌쩍 넘어설 수 밖에 없는 업무 환경이다. 기준가가 자정을 넘겨서 매겨진뒤 다음날 새벽에야 자산운용사에 전달된다. 자산운용사나 수탁은행이 기준가를 사전에 검증하는 것도 불가능한 구조다.



◇오후 4시로 마감 기한 정하는 '컷오프'제도 도입 절실

일반사무관리회사의 잦은 야근으로 직원들은 육아를 병행할 수 없거나 일부 임산부의 경우 유산까지 경험한 것으로 알려졌다. 야만적인 업무 환경에 무방비로 노출된 일반사무관리회사 종사자들은 급기야 이달초에 '펀드인프라 산업노동자협의회' 명의로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종사자들은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제목의 성명을통해 "종가 접수 기준 시점을 오후 4시로 못 박는 이른바 '컷오프(cut off:접수마감)'제를 도입해 달라"고 정부에 제안했다. 종가 접수 기준을이 시간으로 정하면 기준가 산정도 오후 6시30분까지 완료할 수 있고운용사도 공시전에 펀드가격 검증의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실제 금융선진국인 미국의 경우 미국 투자회사법 22C-1개정안과 FINRA(Financial Industry Regulatory Authority) 등에 따라 기준가격 산정시점을 오후 4시로 규정하고 있다. 일본은 기준가격 발표 시점을 오후 8시로 못 박는 방법으로 기준가격 산정의 엄정성을 담보하고 있다. 컷오프 이후에 체결된 매매내역은 다음날 종가에 반영하는 방식으로 기준가격이 산정된다.

문재인 정부는 '사람이 먼저다'라는 기치로 내걸고 각종 경제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금융당국과 자산운용사들도 약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 달라는 촉구를 더는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더불어 잘 사자는 취지로 도입된 근로 시간단축제가 누군가에게 상대적 박탈감만 키우는 등 더 큰 굴레가 되는 건 정의롭지 못하다. (취재부본부장)

neo@yna.co.kr

(끝)
저작권자 © 연합인포맥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