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기껏해야 느슨한 관계를 얻거나,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최근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익명의 관계자를 인용해 현대상선을 저격했다. 지난 3월 취임한 배재훈 현대상선 사장의 최근 유럽 출장길을 두고 한 말이다. 배 사장은 세계 1, 2위 선사인 머스크와 MSC의 최고경영자를 만났다. 머스크와 MSC는 세계 최대 해운동맹(얼라이언스)인 2M의 주축이다. 현대상선은 2M의 정식 멤버는 아니다. 전략적 제휴 관계의 준회원이다. 현대상선의 2M 잔류 기간은 내년 3월까지다. 2M에 남기 위해서는 머스크, MSC와 협상을 해야 한다. 배 사장이 유럽 출장길에 오른 이유다. 2M은 전 세계 해운 물동량의 40%를 담당한다. 2M이 배로 옮긴 20피트짜리 컨테이너만 781만개(작년 6월 기준)에 달한다. CMA-CGM과 COSCO, 에버그린 등이 속한 2위 오션 얼라이언스보다 143만개가 더 많다. 3위인 디 얼라이언스보다는 두배가 더 많다. 2M은 사실상 바다 위에선 최강자다.

선사들이 해운동맹에 들어가야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바다 위에서는 단독 플레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배는 물론 배로 실어 날라야 할 물건들도 공유해야 한다. 뭉쳐야 힘이 생긴다는 지극히 원론적인 원리가 통하는 세상이다. 해운동맹은 경쟁 관점에서 보면 담합의 성격이 짙다. 그런데도 세계 경쟁 당국들이 이를 담합으로 간주한 경우는 없다. 전 세계 교역의 핏줄 역할을 하는 해상물류업에 담합이라는 칼날을 들이대기에는 역효과가 너무 크다. 15분기 연속 적자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현대상선이 2M에 잔류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그렇다면 2M은 시장점유율이 1.8%에 불과하고, 생존이 여전히 불투명한 현대상선을 다시 멤버로 받아들일까. 익명의 해운업계 관계자가 WSJ을 통해 현대상선의 2M 잔류가 어려울 수 있다고 흘린 것은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다. 그 익명의 관계자가 머스크나 MSC 관계자일 수 있다. 동맹 관계를 맺기 위해선 서로 원하는 조건이 맞아야 한다. 힘의 우위에 있는 자들은 목소리도 클 수밖에 없다. 우리 편에 끼워줄 테니 너는 나한테 뭘 줄 수 있냐고 묻는 격이다. 현대상선은 뭘 줄 수 있을까. 동맹을 유지할 수 있는 시한이 내년 3월이지만, 현대상선은 올해 7, 8월 정도까지는 협상을 마무리해야 한다. 2M에 잔류할 수 없다면 다른 동맹을 찾아야 하고 새롭게 협상을 해야 한다. 시간은 현대상선에 있지 않다. 현실적이고 냉정하게 판세를 보면 현대상선이 절대 불리하다. 줄 것도 별로 없고, 시간도 쫓기는 쪽은 현대상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자. 머스크나 MSC가 현대상선을 상대로 협상을 하고 있다고 보는가. 아니다. 그들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협상을 하고 싶어한다. 현대상선의 대주주는 정부(산업은행 13.5%, 해양진흥공사 4.42%)다. 머스크나 MSC는 우리 정부가 현대상선을 살리기 위해 전방위로 뛰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줄 것이 의외로 많을 수 있다는 것도 꿰뚫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정부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줘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도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을테니 말이다. 수세에 몰려 내주는 형국이 아닌 테이블에 마주 앉아 주고받기를 할 수 있을 정도는 만들수 있다는 얘기다. 위기를 기회로, 심지어는 꽃놀이패를 쥔 형국으로 전환시키는 능력을 정부가 보여줘야 할 시점인 셈이다.

머스크는 세계 5대 항로 가운데 유독 아시아∼미주 노선에 약하다. 이 노선은 중국 선사인 COSCO가 장악하고 있다. 배들로 항상 붐비는 상하이항을 떠나고도 싶어한다. 새롭게 짓고 있는 부산신항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다. 이를 발판삼아 COSCO의 아성인 미주 노선을 뚫고 싶어한다. 부산신항에서 머스크 배들이 원활하게 선적과 하적을 할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는 힘은 누구에게 있을까. 답이 뻔히 보인다. 현대상선은 내년 6∼7월에 세계 최대 규모이자 효율성 역시 역대급 수준인 2만3천TEU급 컨테이너선 12척을 동시에 인도받는다. 이 정도 규모의 배를 운용하는 해운동맹은 2M 정도다. 친환경 기술로 무장한 초대형 배를 가지면 그만큼 운임 경쟁력도 커진다. 현대상선의 12척 초대형 컨테이너선을 무기로 세계 시장 점유율 더 늘릴수도 있다. 초대형 배가 많지 않은 오션 얼라이언스와 디 얼라이언스에게 현대상선의 2만3천TEU급 배는 매력적인 대상이 될 수 있다. 2M과의 협상에서 지렛대로 활용할 여지가 있다. 날 잡지 않으면 손해를 볼 수도 있다고.

정부는 2022년까지 해운업 매출을 51조로 확대하겠다는 해운재건 5개년 계획을 작년에 발표했다. 현대상선을 100만TEU급 세계 10위의 선사로 키우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내놨다. 이러한 계획을 온전하게 완성하려면 현대상선이 해운동맹 체제 속에 남게 해야 한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이유다. 문성혁 해양수산부 장관은 지난 7일 기자들과 만나 "해수부는 외교부 다음으로 국제성이 많은 조직이어서 국제화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직원들 의식과 태도부터 국제적인 마인드로 바꿔야겠다. 그런 요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우리 선사들이 바다 위의 강력한 우군을 맞이하도록 해수부가 바다 위 외교전을 펼쳐야 할 시점이다. 그 첫 시험대가 현대상선의 해운동맹 유지가 될 것이다. (기업금융부장 고유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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