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수출이 살아나지 않고 있다. 작년 12월 마이너스로 돌아선 수출은 지난달까지 6개월째 내리막을 타고 있다. 5월 무역수지는 22억7천만 달러에 그쳤다. 작년 12월 41억8천만 달러의 반 토막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그나마 88개월 연속 흑자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게 다행이다. 이런 수출 부진에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은 반도체다. 수출 마이너스 곡선은 반도체 수출 부진과 궤를 같이한다. 작년 12월 8.4% 감소했던 반도체 수출은 지난달에는 무려 30.5% 줄었다. 6개월래 감소 폭이 가장 컸다. D램과 낸드플래시 가격이 속절없이 내려간 탓이다. 단가 회복이 쉽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단기간에 반도체 수출도 플러스로 돌아서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반도체가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를 넘는다는 점에서 수출 '암흑시대'는 좀 더 이어질 수도 있다. 반도체에 편중된 수출 품목을 다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소규모 개방경제 구조하에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에서 고민해야 할 당연한 주제다. 하지만 기술력에 더해 고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세계 시장에서 수위에 오를 수 있는 품목을 찾아내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포스트 반도체'로 떠오르는 게 배터리다. 친환경을 타고 전 세계 완성차 업체들이 전기차에 대한 투자를 가속하고 있다. 전기차의 핵심 부품은 배터리다. 특히 한번 충전으로 더 많이 갈 수 있게 하는 고용량 배터리는 완성차 업체엔 필수 아이템이다. 배터리가 미래의 반도체가 될 수 있다고 보는 이유다. 전 세계 배터리(리튬-이온) 시장은 연평균 25% 성장하고 있다. 2017년 약 37조 원 수준이던 시장 규모는 2025년엔 182조 원으로 불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메모리반도체 시장을 능가하는 규모다. 폭발적인 전기차 수요를 고려하면 배터리 시장의 성장성은 무궁무진하다. 낙관론이 우세하다. 세계 1위 완성차 업체인 폭스바겐마저 2020년까지 연 300만대 이상의 전기차를 팔겠다고 한다. '로드맵 E' 계획이다.

폭발적 성장이 이뤄지는 시장에서의 경쟁은 필연적이다. 전기차 선두주자인 테슬라에 독점 공급권을 가진 일본의 파나소닉과 중국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CATL과 비야디(BYD)가 3강을 형성했다. 3개 기업의 전 세계 시장점유율은 55%를 넘어선다. 2000년대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보였던 치킨게임의 양상마저 나타나 주변 기업들은 도태되면서 점차 과점 시장으로 변화하고 있다. 특히 대규모 투자가 동반돼야 하는 산업의 특성상 자본력과 기술력은 과점체제로 가는 필수적인 요소다. 그만큼 진입장벽이 높은 시장이다. 폭스바겐과의 대규모 공급 계약을 통해 파나소닉을 간발의 차이로 앞서며 1위로 올라선 CATL이 독일에 대규모 공장을 짓는 것은 '슈퍼사이클'을 위한 대비 차원이다. BYD와 함께 10위 기업인 중국의 파라시스마저 유럽에 대규모 공장을 짓는다. 중국 정부의 '배터리 굴기'가 서진(西進)하면서 나타난 결과다. 점차 가열되는 배터리 시장에서 우리 기업들도 선전하고 있다. LG화학과 삼성SDI가 시장점유율 기준 4위와 5위에 올랐고, 후발 주자인 SK이노베이션은 올해 1∼2월 기준 처음으로 10위권에 들어섰다. 전폭적 지원과 대규모 물량 공세를 펴는 CATL과 BYD에 비해 여전히 기술력에서 앞서 있다는 점은 기대를 갖게 한다. 한중일(韓中日) 대표 기업들이 전 세계 배터리 시장을 나눠 먹는 구조다. 결국 세 나라 기업들이 '5강 체제'의 독과점 구조를 형성할 것이란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LG화학과 삼성SDI, SK이노베이션의 누적 수주액은 180조 원에 육박한다. 전기차 돌풍에 본격적으로 올라탄다면 향후 수주는 가파른 우상향 곡선을 탈 것이란 낙관적 전망이 많다. 하지만 최근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벌이는 소송전은 적잖은 우려를 낳는다. LG화학이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와 미국 델라웨어주 지방법원에 SK이노베이션을 이차전지 관련 '영업비밀 침해'로 제소하면서 소송은 시작됐다.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이 기술과 사람을 빼가는 소위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다고 주장한다. SK이노베이션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맞선다. 회사의 명예를 계속해 침해한다면 맞소송도 검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사실상 두 기업은 이미 전면전의 태세로 들어섰다. 물밑에서 서로를 흠집 내는 여론전으로 확전되고 있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업계는 착잡하다. 세계 1위가 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전쟁'이라면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4위와 10위권에 갓 진입한 자국 기업들이 미국까지 가서 소송을 벌이고 있다. 경쟁사로부터 권리를 침해당했다면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소송 등의 조치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결과에 대한 이해득실이 분명해야 한다. 소탐대실의 결과가 예측된다면 멈춰야 한다. 이미 멀찍이 앞서갔거나 뒤에서 바짝 쫓아오고 있는 중국 기업들이 벌써부터 웃고 있다고 한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은 이미 좋은 먹잇감이 되고 있다. 수주 시장은 마타도어가 난무하는 곳이다. "쟤들 싸우는데 물건 받으시겠어요?". 무서운 한마디다. 유럽 시장에서 우리 기업들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이 확산할까 걱정되는 이유다. (기업금융부장 고유권)

pisces738@yna.co.kr

(끝)

저작권자 © 연합인포맥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