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연합인포맥스) 일본 무술 가라테를 모티브로 한 1980년대 미국 영화 '가라테 키드'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괴롭힘까지 당하던 한 소년이 가라테라는 무술을 통해 자신감을 얻고 성장하는 스토리를 담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왜색을 이유로 '베스트 키드'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던 이 미국 영화는 590만 달러의 제작비로 미국에서만 9천81만 달러를 벌어들인, 소위 '대박'을 터뜨린 작품이었다.

당시 미국에서 상대방을 겁주는 말로 "가라테를 할 줄 안다"는 말이 통용될 정도였다니, 영화 속 석양을 등지고 나무 위에 한 발로 서는 이른바 '학 다리' 장면이 지금까지도 충분히 회자될만하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유명한 대사 "왁스 온, 왁스 오프(wax on, wax off)"가 등장한다.

주인공 다니엘에게 가라테를 가르쳤던 미야기라는 인물이 주인공에게 담장을 칠하고 자동차에 왁스를 칠하고 닦아내는 이른바 허드렛일이 시키면서 한 말인데, 보통의 무술 영화가 그렇듯 나중에 알고 보니 이는 무술을 연마하는데 기본이 되는 아주 중요한 훈련이었다.

당시 미국의 각종 드라마나 TV쇼에서 불특정다수의 일본 이름으로 미야기가 자주 거론될 만큼 영화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그 영향력은 꼬리를 물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우리에게 친숙해진 '리스크온, 리스크오프(risk on, risk off)'라는 말까지 이어졌다. 어린 시절 '가라테 키드'를 보고 성장한 월가의 트레이더들이 '리스크온, 리스크오프'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시장에 낙관적인 전망이 많아질 경우 리스크가 큰 자산에 자금을 투자하는 것은 리스크온이다. 반대로 부정적인 우려가 커질 때는 위험이 적은 자산으로 쏠리는데 이게 리스크오프다.

이 문구가 요즘만큼 잘 들어맞을 때가 있었나 싶다. 무역과 중앙은행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리스크온과 리스크오프가 반복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의 분석에 따르면 리스크온이나 리스크오프 심리를 반영하는 자산군은 지난 19일까지 과거 100일 동안 거의 4분의 1을 함께 움직였다. 이는 2016년 중반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S&P500과 유로-달러는 최근 대표적인 리스크온 자산으로 낙관론이 올라갈 때 상승했다. 반면 10년 만기 미 국채수익률과 달러-엔은 비관론이 커질 때 내려간다. 미 국채와 일본 엔화는 리스크오프 자산이다.

연방준비제도(Fed·연준)와 유럽중앙은행(ECB)의 통화 정책 변화, 워싱턴에서 나오는 무역 긴장 온앤오프에 투자자들이 집중하다 보니 올해 초부터 리스크온, 리스크오프 날들이 빠르게 늘어났다.

여기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SNS 사랑 때문에 최근에는 '트윗온, 트윗오프'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짧은 글 몇 줄에 시장은 크게 영향을 받는다.

지난 5월 6~7일은 '트윗온발(發) 리스크오프 데이'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트윗을 통해 "중국과의 무역협상은 계속되지만, 너무 더디다. 그들은 재협상을 시도하고 있다. 안 된다!"며 중국에 새로운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한 뒤 국채수익률은 떨어졌고, 주가는 폭락했다.

한 달 뒤인 6월 4일은 전형적인 '리스크온 데이'였다. S&P500은 2% 급등하고, 국채수익률은 큰 폭 올랐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다음 움직임이 금리 인상인지, 인하인지 논의를 끝냈다고 시사해 시장에서는 금리 인하 여부와 시기에 초점을 맞췄다.

이후 시장은 연준이 7월에 50bp까지 금리를 인하할 수 있다고 앞서갔고 리스크온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지난 25일 파월 의장이 단기적인 지표 및 심리 변동에 과민 대응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서야 치솟던 리스크온은 다소 물러났다.

앞서가는 시장과 이에 제동을 거는 연준의 술래잡기, 시장에 반응하는 연준에 다시 시장 불확실성은 커졌다.

이 가운데 금값은 온스당 1,400달러를 넘어섰다. 리스크온과 리스크오프가 극심했던 10년 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금은 최고 수혜주였다.

과거 투자자들은 기업의 수익성 등 개별 이슈에 따라 채권이나 주식을 사고팔았지만, 중앙은행이라는 거대한 힘이 채권 매입 프로그램 등을 통한 양적 완화를 소개한 뒤에는 위험에 따라 분류된 자산군이 함께 움직이는 패턴이 강해졌다. 예외적인 정책이 글로벌 경제를 침체에서 구해낼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고, 위기에서 또 다른 장애물이 생길 수도 있음을 봤기 때문이다.

WSJ은 투자자들이 미래를 흑과 백으로 보고 있다고 진단했다. 월가에서도 "많은 것들이 2진법 같다"라는 반응이 나온다. 스위치를 켜고(on), 끄듯(off), 0과 1뿐으로, 중간 지대가 없는 2진법 세상이다. (곽세연 특파원)

sykwak@yna.co.kr

(끝)

본 기사는 인포맥스 금융정보 단말기로 08시 45분에 서비스된 기사입니다.
인포맥스 금융정보 서비스 문의 (398-5209)
저작권자 © 연합인포맥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