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반도체 산업의 위기는 곧 한국 경제의 위기다. 반도체는 지난 30여년간 우리 경제의 성장축이자 버팀목이었다. 앞으로 한동안, 적어도 수년간은 이 흐름이 바뀌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 반도체의 뒤를 이을 차세대 산업이 과연 뭐가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다. 일본의 대한국 수출 규제가 본격화된 지금이 한국 경제 위기의 시작일 수 있다는 걱정이 앞서는 이유다.

한국무역협회 등에 따르면 반도체가 우리나라 주력 수출품목이 된 건 1980년대 후반부터다. 이전까지는 의류와 가구 등이 최고 효자 상품이었다. 반도체는 1992년 처음으로 수출품목 1위 자리를 차지했다. 이후 반도체의 독주였다. 2000년대 들어 글로벌 환경 변화에 따라 다소 부침이 있기는 했지만, 2013년 이후 반도체의 위치는 더욱 공고해졌다. 지난해 반도체 수출금액은 1천267억달러로, 2위인 석유제품(466억달러)과 3위 자동차(409억달러)를 합친 금액보다 훨씬 많았다.

한국은행 고위 관계자가 1990년 전후 조사국에 근무할 때 얘기다. 당시 우리 경제를 전망할 때 가장 주목한 외부 변수는 국제 유가와 반도체 가격이었다고 했다. 지금이나 30년 전이나 우리 경제를 둘러싼 환경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당시 원유는 우리나라 수입품목 1위 상품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다만, 유가의 경제 파급력은 이전 같지 않다. 석유제품 등 원유 가공산업이 발달한 덕분에 유가가 오르거나 내리거나 양과 음의 효과가 서로 맞물리기 때문이다.

반도체의 파급력은 오히려 계속 커지는 추세다. 2000년대 들어 컴퓨터와 무선통신기기, 조선업 등의 흥망이 거듭되는 동안에도 반도체는 탄탄대로였다. 반도체 수출 비중은 이미 20%를 넘어섰다. 지난해 우리나라 국내총생산의 약 7.8%에 달한다. 우리나라 광공업생산에서 차지하는 반도체 생산 비중도 10%를 웃돌고 있다.

이처럼 반도체 산업의 비중이 높다 보니 우리 경제를 책임지는 정부와 한국은행은 여전히 반도체 경기만 쳐다보는 형국이다. 이주열 한은 총재가 최근 기준금리 인하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들었던 근거 중 하나도 '반도체 경기 회복 지연 가능성'이다. 반도체 업황의 가늠자 격인 D램 가격은 지난해 10월부터 내리 하락세다. 고점 대비로는 60%가량 떨어졌다.

일본의 대한국 수출 규제로 반도체 업계가 휘청이면 우리 경제에도 치명타가 될 수밖에 없다. 이번 수출규제 대상 품목은 반도체 품질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감광, 식각 공정의 핵심 소재들이다. 일본 업체의 점유율이 90% 이상인 것으로 알려져 수출 규제가 장기화하면 그 피해는 매우 심각할 수 있다. 당분간 재고 물량으로 버틴다고 하지만, 길어야 수개월이라는 게 전문가들 얘기다. 반도체가 우리 경제의 효자라는 데 이견은 없지만, 이제는 관리 대상이면서 경계 대상이 된 셈이다. 반도체를 제외한 주력산업 부진에도 전체 수출액이 주는 착시현상에 빠져 구조개혁 시기를 놓친 결과다.

이주열 총재는 6년 전 정부와 정치권에서 기준금리 인하를 압박할 때 줄기차게 "구조개혁이 먼저"라고 강조해왔다. 지금도 정부나 금융당국, 한국은행 모두 구조개혁이 필요하다고 얘기하지만 정작 눈에 띄게 변화하는 모습은 찾기 어렵다. 정부의 재정정책은 번번이 국회에서 발목이 잡히고, 그렇다 보니 만만한 게 통화정책이라고 금리 인하를 요구하는 목소리만 넘쳐난다. 근본이 바뀌지 않는데 기준금리만 움직이는 건 미봉책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위기가 기회라고, 반도체 산업에 대한 경계 심리가 어느 때보다 커진 지금이 경제 체질에 변화를 주는 호기가 될 수 있다. 개혁다운 개혁을 할 수 있는 정부 당국의 리더십 구축이 시급해 보인다. (금융시장부장 한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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