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지난해까지 주식시장을 휘젓고 다니던 거대한 멸치가 벌금을 맞았다. 멸치는 투자자들이 시장에서 메릴린치증권을 지칭하는 별명이다.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회는 전일 미국계 증권사인 메릴린치인터내셔날엘엘씨증권 서울지점에 회원제재금을 부과했다. 회원제재금 규모는 우리 돈 1억7천500만원이다.

한국거래소는 "메릴린치증권이 2017년 10월부터 2018년 5월 중 위탁자인 C사로부터 430개 종목에서 모두 6천220회의 허수성 주문을 수탁해 시장감시 규정 제4조3항을 위반했다"며 제재 사유를 밝혔다.

이렇게 국내 증시 개미투자자들의 울분을 샀던 메릴린치 사건은 일단락되는 모양새다.

하지만 조금 더 살펴보면 상황은 조금 다르게 해석된다.

거래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메릴린치증권사가 8개월 동안 거래한 금액은 총 900만주, 847억원 수준이다.

해당 증권사는 같은 기간 동안 총 80조원의 거래를 수탁했고, 위탁자인 C사는 약 2천200억원대의 매매차익을 시현했다고 거래소는 밝혔다.

8개월 동안 2천200억원의 수익을 낸 C증권사는 우리나라에서 해당 거래로만 한 달 평균 275억원씩 벌어간 셈이다.

굳이 계산기를 두드려보지 않아도 상황이 이쯤 되면 전일 제재금을 부과받은 메릴린치증권 서울지점 관계자들은 아마도 미소를 금치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알고리즘 거래의 수수료율은 일반 주문보다 훨씬 싸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메릴린치가 C사로부터 받은 위탁수수료는 0.01%에도 못 미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그러나 C사로부터 수탁받은 금액만 무려 80조원에 달하니 메릴린치증권으로선 이런 남는 장사가 없다. 남는 장사 수준이 아니다. 초기에 설계한 알고리즘대로 사람 손을 일일이 거치지 않고 자동으로 번 돈이니 그야말로 '손 안대고 코 푸는 장사'라 할 수 있다.

거래소는 제재금 부과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메릴린치증권의 회원제재금은 알고리즘 거래 중 '허수성 주문수탁 위반' 사례에 제재금을 매기는 첫 사례라고 한다.

지난 2009년 8월 홍콩소재 위탁계좌의 알고리즘 거래로 발생한 KOSPI200 옵션 가장성 매매에 대해 수탁책임을 물어 S증권에 회원주의 조치를 한 바 있지만 알고리즘 거래 중 허수성 주문 수탁위반 사례는 처음이라는 이야기다.

거래소 입장에서는 주문을 위탁받아 처리한 메릴린치가 명확하게 잘못한 부분만 제재를 해야 하기 때문에 강력한 제재는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번 제재금은 시장 교란 행위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난을 피해가기 어려워 보인다. 2천200억원을 벌고 제재금 1억7천500만원이라니 국내 증시를 한번쯤 교란해 볼 만하지 않은가. 실제 주문을 낸 C사에 대한 제재는 금융당국이 판단할 문제라 아직 결정되지도 않은 상태다.

우리나라 자본시장법은 위반행위로 얻은 이익이 50억원 이상인 경우 무기 또는 5년 이상 징역에 처할 정도로 엄격하게 규정돼 있다. 하지만 증시 관계자들에 따르면 실제로는 부당이득 산정을 제대로 하지 않아 무기징역에 처해진 사례는 전무할 뿐 아니라 부당이득 추징이나 몰수도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10전(0.1원) 단위도 엄격히 따지는 금융시장에서 위반행위가 발생해도 처벌 과정에서 요리조리 복잡하게 빠져나가 결국 얼마나 해 먹었는지조차 계산이 제대로 안 된다는 말이다.

메릴린치증권이 시장감시위원회를 개최할 때마다 추가적인 의견 진술을 요청하면서 회의가 4차례나 열린 것을 보면 거래소도 판단이 쉽지 않았던 셈이다.

한 증시 관계자는 거래소의 회원 제재금 1억7천500만원을 두고 '상징적인 의미를 둔 제재'라고 일축했다. 메릴린치증권 관계자들이 그 정도로 소명과 로비를 잘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시장을 교란한 자가 밤잠을 못 이뤄야 하는 법인데 정작 시장 교란으로 재산을 잃은 개미투자자들만 밤잠을 못 이루고 있으니 참 냉혹한 시장이다. (자본시장부 정선영 기자)

syj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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