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주 = 글로벌 무역이 미국의 보호주의 주창 속에 대혼돈의 시대로 빠져들고있습니다.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한지 24년. 중국이 WTO에 가입한지 18년만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무역 전쟁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면서 이 혼돈은 시작됐습니다. 금융위기 10년만에 그늘에서 벗어나려던 전세계 경제는 다시 침체 위험에 직면해 있습니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지난 18일 기준금리를 전격인하하는 등 각국 중앙은행은 완화적 통화정책으로 서둘러 전환하려 합니다.통화정책만이 아니라 경제와 무역, 금융 등 각 분야에서 의미 있는 전환의 조짐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연합인포맥스는 7개 꼭지로 이같은 흐름을 짚어보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서울=연합인포맥스) 문정현 기자 = 일본의 한국 수출 규제로 글로벌 무역분쟁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아베 신조 내각이 한국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수출에 제동을 걸면서 정치와 안보, 외교, 경제의 영역이 불분명한 무역분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중국의 글로벌 패권국 도전과 기술굴기를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 무역분쟁을 벌이고 있고, 이민 문제 해결을 위해 멕시코에 관세 부과를 위협하기도 했다.

이 같은 갈등은 여러 영역의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에 해결책을 모색하기 쉽지 않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만큼 글로벌 경제에 끼치는 영향도 커질 수밖에 없다.

단순한 '무역' 이슈에 국한되지 않은 '무역갈등'이 전 세계적으로 일반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 세계의 트럼프화(Trumpification)…질서 붕괴 우려 고조

해외 매체들과 경제 전문가들은 이번 일본의 한국 수출 규제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이달 4일부터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생산하는데 필수 소재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PI), 포토레지스트,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의 한국 수출을 제한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6월 말 주요 20개국(G20) 회의에서 '자유롭고 개방된 경제는 글로벌 평화와 번영의 근간'이라고 말했던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이틀 뒤 자유무역에 반하는 조치를 취했다고 비판했다.

NYT는 아베 총리가 안보에 대한 불확실한 우려를 이유로 한국에 대한 수출을 제한했다며, 이로써 미국, 러시아처럼 안보를 무역제한 수단으로 이용해 온 국가의 대열에 일본이 합류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홍콩 중문대의 브라이언 머큐리오 국제통상법 교수는 "이와 같은 방법이 너무 자주 쓰이면 전체 국제 교역 시스템이 파괴될 수 있다"며 "한 두개의 국가가 아니라 10~15개의 국가가 빈약하게 정의된 안보상 예외를 이유로 일방적인 조치를 취한다면 (세계적인) 질서의 가치를 떨어뜨릴 것"이라고 말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자유무역의 챔피언인 일본이 트럼프의 각본을 따라하고 있다며 "일본이 기술 수출을 외교적 분쟁의 무기(weapon)로 사용하기로 한 결정은 상호 연결된 세계에서 자국의 취약성을 의식해오던 자원 부족 국가에 있어 전략적 대격변을 시사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정치적 이유로 수출 규제나 경제 제재가 이뤄진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10년 센카쿠 열도 영유권 분쟁 당시 중국이 일본에 대한 희토류 수출을 금지한 바 있고, 가깝게는 이란의 핵개발, 북한의 미사일 실험과 관련한 경제 제재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트럼프 정권이 들어선 이후 이와 같은 추세는 점점 노골적으로 뚜렷해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캐나다, 멕시코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나프타)을 대체하기 위한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을 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5월 30일 미국으로 유입되는 불법 이민자를 막기 위해 멕시코에서 들어오는 모든 상품에 5%의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당시 달러 대비 멕시코 페소 가치가 2% 넘게 급락하고 일본, 홍콩 등 아시아 증시가 하락하는 등 금융시장이 휘청댔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작년 3월 미국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른 철강·알루미늄 수입의 안보 영향 조사 결과를 토대로 수입산 철강과 알루미늄에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미국 정치학자 월터 러셀 미드 바드대 교수는 WSJ 기고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민간의 삶으로 돌아가면(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 트럼프식의) 개인적이고, 즉흥적이고, 일방적인 외교가 사라질 것이라고 많이들 기대하고 있지만 일본과 관련한 최근 상황은 세계 정치의 트럼프화(Trumpification of world politics)가 당분간 잔류할 것임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미드 교수는 "분명히 추측할 수 있는 점은, 일본이 (그간 적용돼 오던) 규칙 기반의 국제적 시스템이 계속 약화하리라고 본다는 점"이라며 "일본은 트럼프 방식으로 얻을 수 있는 이점을 극대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 전 세계적으로 정치, 외교적 문제를 무역과 경제 보복으로 푸는 상황이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다.

올해 4월 유럽연합(EU)은 영국이 아무런 합의 없이 EU를 탈퇴하는 '노딜 브렉시트'가 발생하면 곧바로 영국과의 국경에 세관을 설치하고 영국산 제품에 수입 관세를 부과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모든 영국산 제품에 수출 장벽을 세우겠다는 얘기다.

테리사 메이 총리 사퇴 이후 총리 후보로 나선 보리스 존슨 전 외무장관과 제러미 헌트 현 외무장관이 노딜 브렉시트도 감수하겠다는 스탠스를 보이면서 유럽에서도 정치·경제적 갈등이 심화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 유럽, 아시아 등 전세계적으로 평온한 질서가 아닌 보복과 갈등이 일상화하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 "한·일 넘어 글로벌로 영향 확대"

일본은 이번 제재를 할 수밖에 없는 배경을 설명하면서도 파장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아사히신문 등 일본 매체들은 일본의 수출 규제로 한국 기술기업들이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면서도 한국 반도체 업체와 거래하는 일본 기업이나 글로벌 부품 공급망에 영향이 확산할 우려가 있다는 목소리가 업계에서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후지뉴스네트워크(FNN)는 일본종합연구소의 무코야마 히데히코 수석 주임 연구원의 발언을 인용해 "일본의 제재가 본격화한다면 한국 기업에 8, 일본 기업의 2 정도의 영향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한국 반도체 생산이 멈춘다면 한국 경제뿐만 아니라 일본 기업, 일본 경제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해외 경제 전문가들도 영향 확산을 우려하고 있다.

옥스포드이코노믹스는 연합인포맥스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화학물질(소재)에 대한 일본의 승인 절차가 오래 걸리면 한국의 반도체 제조업체들은 생산을 추가로 줄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중국의 약한 수요에 따른 재고 물량이 영향을 상쇄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나 이는 글로벌 공급망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옥스퍼드이코노믹스는 일본의 수출 규제에 따른 성장 하방 위험이 커지면서 한국의 통화정책이 계속 완화적인 상황을 이어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제신용평가사 피치는 "이번에 규제 대상이 된 소재를 한국에 공급하는 일본 기업, 그리고 한국으로부터 메모리 칩·디스플레이를 사들이는 일본 업체도 고통을 받을 것"이라며 "(한·일) 분쟁이 고조될 경우 일본 수출업체는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일본의 수출 규제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고 내다봤다.

피치는 "규제는 한국 기업뿐만 아니라 글로벌 기술 생태계에 참가하고 있는 다른 시장의 기업들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에서는 오는 21일 실시되는 일본 참의원 선거 이후에 사태가 완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지만 일본 언론에서는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어 시계 제로의 상황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한국 정부 내에서는 '이번 조치가 아베 총리의 선거 대책이고 참의원 선거가 끝나면 누그러질 것'이라는 낙관론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만만치 않다. 일본 정부도 퇴로를 끊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신문은 아베 정부가 이번 조치를 발동한 이유 중 하나로 '한·일간 신뢰가 심각하게 손상됐다'는 점을 꼽았다며, 이는 징용공 판결과 관련해 한국 정부로부터 납득할만한 답변을 받지 않는 한 쉽게 철회하지 않을 방침을 시사한다고 진단했다.

 

<메모리 반도체 세계시장 및 국내 반도체 생산규모·점유율. 출처: 산업연구원 IHS 인용. 단위: 억 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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