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래은행 입찰 유찰…'30년 곳간지기' 국민銀 무혈입성 무게



(서울=연합인포맥스) 정지서 기자 = 22조원의 예산을 운영하는 공무원연금공단 주거래은행 입찰이 유찰됐다.

그간 기관영업 경쟁이 치열해지자 손해를 감수하며 주거래은행, 금고은행 유치전에 참여했던 은행들 사이에서도 이제는 명분보다는 실리를 챙기겠다는 변화의 기운이 감지되고 있다.

11일 금융권에 따르면 공무원연금공단은 지난 9일 주거래은행 사업자 선정을 위한 입찰제안서를 신청받았지만 유찰됐다. 지난 30년간 주거래은행을 맡아왔던 KB국민은행만 제안서를 제출하며 유효경쟁이 성립되지 않았다.

국민연금과 함께 국내 4대 연기금 중 한 곳인 공무원연금공단의 주거래은행 입찰이 유찰된 것은 꽤 이례적인 일이다. 사전 설명회에는 국민·신한·우리·농협·KEB하나은행 등 시중은행 5곳이 모두 참여했다.

은행권에선 제안금리 기준이 너무 높았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공무원연금공단은 '한국은행 기준금리+α'로 제안금리를 요구했는데, 은행에는 손해를 감내하고 들어오라는 뜻과 같았기 때문이다.

설명회에서 강조한 연간 22조원의 예산과 170만명에 달하는 연금법 적용 인원도 은행의 구미를 당기진 못했다. 각종 사업비를 제외하고 은행이 예수금으로 확보할 수 있는 자금은 2천억원 남짓인 데다 잠재 고객을 대상으로 독점적인 사업권이 별도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어서다. 또 수십억원대로 추산되는 새로운 IT시스템 개발비용도 은행이 부담해야 한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공단이 강조한 예산, 기금운용 규모, 잠재고객 풀 등의 숫자가 현실과는 동떨어져 사업성이 없었다"면서 "제안금리는 조달금리를 고려해 노마진까지 감내할 수 있지만, 추가 손실을 기정사실로 한 입찰에 참여할 은행은 없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공무원연금공단은 전일 주거래은행 선정작업을 위한 공고를 다시 냈다. 오는 17일 추가 설명회를 열고 23일에 제안서를 신청받을 예정이다.

재입찰 소식에도 은행권의 분위기는 냉랭하다. 별다른 조건 변화 없이는 입찰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이 크다. 이에 국민은행의 무혈입성 가능성에 힘이 실린다.

공무원연금공단 관계자는 "재공고를 내더라도 입찰 조건을 변경할 수는 없다"며 "만약 재입찰도 유찰된다면 국가계약법에 따라 절차상 수의계약으로 전환될 확률이 높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서울시금고를 시작으로 과다출혈 경쟁이 시작되자 은행권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컸다. 행정안전부가 올해 초 '지방자치단체 금고지정 평가 기준 개선안'을 마련해 은행들의 출연금 배점을 낮춘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하지만 일부 지자체와 공공기관은 여전히 이러한 은행 간 경쟁 구도를 이용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시금고 이후 구 금고 경쟁이나 일부 공공기관 주거래은행 입찰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도 비슷한 사례였다. 대출 등을 통해 중소기업과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를 측정하는 데 은행들이 부담을 느끼자, 결국 기존 주거래은행이었던 우리은행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또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과거에는 상징성, 은행의 이미지, 신뢰도 등을 위해 무리하게 영업을 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이제는 달라졌다"며 "장기적인 수익성과 신사업 창출 가치 등을 따져 실리적인 접근을 하자는 분위기"라고 진단했다.

금융당국은 행안부가 발표한 개선안 중심으로 은행의 기관영업 추세를 좀 더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은행뿐만 아니라 지자체, 공공기관도 서로 윈윈할 수 있는 상생의 자세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며 "기존의 울며 겨자먹기식 경쟁은 수익성과 건전성에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지자체 등 은행의 기관영업 과정에 발생하는 문제점을 지속해서 살펴보고 제도개선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jsje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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