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총수는 접니다". 올해 여름을 앞둔 어느 날. 국내 굴지 대기업 그룹의 총수가 전문경영인인 '2인자'를 불러서 한 말이라고 한다. 짧지만 굵고 강력한 메시지였다. 일 똑바로 하라는 불호령인 동시에 의사결정을 함부로 뒤집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그 말을 들은 전문경영인은 등골이 오싹했을 것이다. 건너 건너 이 광경을 전해 들은 다른 임원들은 좌불안석이었다고 한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올겨울이 추울 수 있겠다고 직감하면서.

경기가 어렵다고 기업들은 아우성친다. 미국과 중국이 무역 문제로 싸움질을 하면서 전 세계 교역은 망가지고 있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은 최대 피해자가 되고 있다. 수출은 10개월째 마이너스다. 올해 안에 플러스를 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당연히 기업들의 실적은 바닥을 기고 있다. 투자와 고용에 인색할 수밖에 없다. 기업이 움츠러들자 내수도 쉽지 않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과 소비패턴의 변화가 큰 영향이지만 실적이 급전직하한 유통업계는 곡소리를 내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돌파구가 필요하지만 당장 눈에 들어오는 묘책은 없다. 일단 사람이라도 바꿔보자는 생각이 커진 모양이다. 그래서 때아닌 가을철 인사 태풍이 몰아치고 있다. 물러나는 사람에 대한 위로와 새로 들어오는 사람에 대한 축하는 없다. 모두가 숨죽이고 있을 뿐이다. 이전의 인사철 모습과는 다르다.

한상범 부회장. LG그룹을 '올레드(OLED) 왕국'으로 올라서게 한 장본인이다. 8년여간 LG디스플레이의 수장을 맡아 한국 디스플레이산업의 부흥기를 이끌었다. 대규모 투자와 과감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꾀한 최고경영자(CEO)다. 하지만 지난달 그는 허망하게 물러났다. 최악의 적자 상황을 타개하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졌다. 정기 인사 시즌도 아니고, 주주총회 시즌도 아닌데 그룹 내 핵심 계열사 CEO가 교체됐다. '인화(人和)'를 앞세웠던 LG그룹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장면이었다. LG그룹의 연말 인사가 대대적인 물갈이가 될 것이란 얘기가 나온다.

한화그룹도 지난달 대규모 CEO 교체 인사를 단행했다. 그룹 내 대표 기업 7곳의 CEO를 동시에 바꿨다. 그룹이 내세운 이유는 경영 내실화와 미래 지속경영이었지만, 철저한 신상필벌 인사였다. 거기에 더해 세대교체의 성격도 강했다. 삼성전자 출신으로 ㈜한화 기계 부문 새 대표이사가 된 옥경석 사장을 빼면 6명의 새 CEO가 모두 1960년대생이다. 세대교체를 통해 불확실성의 시대를 돌파하겠다는 김승연 회장의 의지라는 평가가 많았다.

사상 첫 분기 적자를 냈던 신세계그룹 이마트 부문은 정기 인사를 한달가량 앞당겼다. 예상을 뛰어넘는 물갈이 인사였다. 이마트의 산증인인 이갑수 전 대표는 지난 주말 해임 통보를 받았다. 그를 대신할 구원투수는 51세의 외국계 컨설팅사의 유통 전문 컨설턴트였다. 그간 이마트의 사업과 재무, 전략을 이끌었던 임원들은 모두 줄줄이 물러났다. 정용진 부회장의 충격 요법에 다들 놀란 눈치다.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온다.

LG디스플레이, 한화그룹, 이마트와 같은 사례는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비슷한 사정의 기업들은 사람을 바꿔 새로운 성장의 동력을 찾으려 할 것이다. 늦가을 태풍이 겨울 초입의 거센 삭풍으로 이어갈 수도 있다. 그사이 불쑥 해임 통보를 받는 임원들이 또 나올 수도 있다. 두 달 남은 기간 미리 짐을 싸고 있는 임원들도 있겠다 싶다. 불확실성의 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안타까우면서도 잔인한 장면들이다.

세대교체의 바람도 거셀 것으로 보인다. 대기업 그룹 총수들이 젊어지면서 새로운 진용을 짜려는 욕구가 강하기 때문이다. 삼성과 현대차, LG그룹의 총수는 1968년(이재용), 1970년(정의선), 1978년(구광모)생이다. 인사 태풍을 일으킨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도 1968년생이다. 이들과 견줘 1960년생인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1955년생인 신동빈 롯데 회장은 '원로급'이다. 젊은 총수들은 분명 이전 아버지 세대와는 마인드 자체가 틀리다. 복잡한 서류와 의전을 태생적으로 싫어한다. 전통산업보다는 미래 기술에 관심이 크고, 그런 데서 새로운 사업을 찾으려 한다. 스테레오 타입의 경영 방식을 고수해 온 '아버지 사람들'과는 생각 자체가 다르다. 신상필벌이든 세대교체든 결국 인사의 목적은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기 위함이다. 사업을 한두단계 더 고도화하고 지속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밑바탕을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람에서부터 시작된다. 늦가을의 인사 태풍이 기업들의 뜨거운 동력이 됐으면 한다. 대신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끝까지 예를 갖췄으면 한다. (기업금융부장 고유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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