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사진)이 지난 9일 83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그는 샐러리맨의 신화였다. 31살이던 1967년 서울 충무로에 자본금 500만원으로 대우실업을 세워 1998년 기준 매출액 91조원의 거대 그룹을 일궜다.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가 100만부나 팔릴 정도로 승승장구하던 김 전회장은 IMF외환위기 직후 국가 경제의 공적으로 전락했다. 그의 과도한 차입 경영이 고금리에 발목이 잡히면서다. 20세기가 마감되면서 대우그룹은 결국 해체됐고 21조원에 이르는 공적자금이 기업회생을 위해 투입됐다.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회장의 일생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영욕(榮辱)'이다.







김 전회장은 국내 금융시장에서도 애증(愛憎)의 대상이었다. 그는인재 경영을 앞세워 대우증권을 업계의 독보적인 1등으로 키워냈다. 지금도 여의도 증권가는 대우 출신 최고 경영자가 수두룩하다. 그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대우증권 직원들을 시카고 선물거래소 등에 파견해 선진 금융기법을 배우도록 장려했다. 국내 금융시장에 파생금융기법이 이식된 데도 김회장의 공이 적지 않다. 거액의 파견 교육비를 지원받은 직원이 높은연봉을 찾아 이직하는 경우도 잦았다. 여력이 없던 경쟁 업체가 고액 연봉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파견직원을 회유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우증권은 해당 직원들에 대한 구상권 행사 등에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어차피 해당 직원이 국내 금융시장 발전에 이바지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대우증권 출신 금융인들이 '선이 굵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김 전회장의 경영스타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회사채와 머니마켓펀드(MMF) 입장에서 고 김우중회장은 대재앙이었다. 1999년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당시 투신업계가 100조원짜리 환매 폭탄을 맞았기 때문이다. 그 해 7월 255조원에 달했던 투신사 수탁고는 대규모 환매사태로 불과 10개월 만에 157조원까지 쪼그라들었다. 이른바 '대우채 사태'가 촉발된 것이다. 대우채 사태이전까지 은행에 예금으로 묶여 있던 돈은 MMF 등을 통해 투신사로 대거 이동했다. MMF에 편입될 수 있었던 회사채 시장도 풍부한 유동성의 향연을 즐겼다. 개인들도 간접적인 형태이지만 채권시장에 투자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우그룹이 고금리로 발행한 채권과 CP는 칼끝에 묻은 꿀처럼 치명적이었다. 고금리의 대우채를 편입한 펀드가 110조원 규모에 달할 정도였다. 대우채와 CP로 펀드 설정규모의 80%를 채운 곳도 있을 정도로 고금리에 대한 탐욕은 끝이 없었다. 결국 100조원에 이르는 환매사태가 촉발됐고 한국투신,대한투신,국민투신 등 '3투신 시대'의 종말에도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김 전회장의 몰락은 '회사채 신속인수제도' 도입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우그룹과 비슷한 처지에 몰렸던 옛 현대그룹(지금의 현대차그룹,현대중공업,현대그룹의 모태)은 회사채 신속인수제도 덕분에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코스피지수는 옛 현대그룹의 유동성 위기 등으로 2000년 하반기들어 반토막이 날 정도로 급락세를 거듭했다>

대우그룹 해체 등으로 2000년 10월31일 코스피지수가 483.58까지 내려서면서 1998년 IMF 구제금융에 이어 다시 한번 나라가 거덜날 것이라는 공포가 엄습했다. 특히 옛 현대그룹은 매출 부진에 따른 유동성 부족으로 바람 앞의 등불같은 신세로 전락했다. 급기야 2000년 3월14일,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이른바 '왕자의 난'이라 일컬어진 경영권 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형제들은 그룹의 모태였던 현대건설이 유동성 위기를 겪으면서 경영권 다툼을 벌였다. 두 달 뒤 채권단이 1천억원에 이르는 유동성을 현대건설에 긴급 지원했지만 언발에 오줌 누기였다. 대한민국 성장의자존심이었고 그룹의 정신적 지주였던 현대건설은 결국 2000년 8월 워크아웃에 돌입했다.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가 그룹 전체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정부는 2001년 1월 회사채 신속인수제도를 전격 도입했다. 대우그룹 해체에 이어 당시 현대그룹까지 타격을 받으면 나라 경제가 수습 불가능한 수렁으로 빠질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회사채 신속 인수제도는 기업이 회사채를 발행하면 산업은행 등 정책금융 기관이 80%를 인수하고 나머지 20%를 채권은행과 기업이 책임지는 특혜성 금융지원 대책이다. 2001년 제도 도입 당시 인수되는 회사채의 80%가 현대 관련 채권이었다. 현대그룹을 위한 특혜성 지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제도였다.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다가 지금은 효자가 된 SK하이닉스(예전 하이닉스) 등도 이 제도의 도움으로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셈이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좀처럼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지 못하고 경제관료들을 탓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김 전회장 입장에서는 왜 현대는 되고 대우는 되지 못했는지 납득하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회장측은 대우그룹도 회사채 신속인수제도를 적용했다면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해왔고 전혀 터무니 없는 주장도 아닌 듯하다.<본보 2014년 8월25일자 '대우·현대와 회사채 신속인수' 참조>

한 때 국내 10만명,해외 25만명에 이르는 '대우가족'을 이끌던 김 전회장이 떠나면서 남긴 교훈은 간명하다. 지금 잘 나가는 재벌과 금융회사들 모두 국가적인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IMF외환위기,글로벌 금융위기 등을 넘기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재벌 2세,3세들은 물론 금융지주 경영진 등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가적 지원 여부에 따라 명운이 엇갈린 재벌가와 금융회사들은 지금도 우리 곁에 있다.(취재부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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