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2008년 가을 일본 도쿄의 노무라종합연구소를 방문한 적이 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로 촉발된 미국발(發) 금융위기의 후폭풍이 여전하던 때다. 일본의 최대 싱크탱크인 노무라는 과연 거시경제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지 관심이 컸다. 하지만 기대는 빗나갔다. 노무라 측 관계자는 온통 IT(정보기술)와 디지털에 대해서만 장황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자신들의 벌이 가운데 이미 절반 이상이 IT에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내가 상상한 경제연구소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앞으로의 금융시장, 거시경제에 대한 전망과 자산시장의 변화 등에 대한 설명은 뒷전이었다. 노무라는 대신 미래를 얘기했다. 특히 기업의 미래 핵심 키워드가 디지털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당시엔 솔직히 잘 와닿지 않았다. 좀 뜬구름 잡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났다. 그 당시 나의 무관심이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요즘 절실히 깨닫고 있다.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 기업들은 온통 디지털에 푹 빠져있다.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라는 말은 일상화됐다. 경자년 새해 첫 업무를 시작한 지난 2일 재계 총수와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쏟아낸 말 중 가장 많은 빈도를 보인 단어는 '디지털'이었다. 디지털과 함께 쓰인 단어는 미래와 지속 가능과 같은 것들이었다. 디지털을 무기 삼아 과감한 변화를 이뤄내지 않는다면 미래도 지속 가능도 없다는 위기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수출이 전부인 것 같았던 대한민국이 보호주의의 역습에 휘청이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진이 남은 2009년 이후 처음으로 지난해 두 자릿수 마이너스 성장을 보였다. 반도체는 2018년보다 물량 기준으로 더 팔았지만, 가격 급락에 수출 금액은 대폭 줄었다. 더 팔아도 손해를 보는 구조가 된 것이다.

기업들이 디지털을 외치는 것은 미래성장동력을 찾으려는 절박한 심정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중장기 불황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위기의식도 한몫하고 있다. 기술의 진보를 통해 더 좋은 제품을 만들어 판다고 이익이 보장되지 않는 시대가 됐다. 더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은 기본이 됐다. 얼마나 원가를 절감할 수 있느냐가 이익의 크기를 결정짓게 된 것이다. 원가에는 단순히 제품을 만들기 위한 원재료비만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제품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모든 공정과 소비로 이어지는 과정 등을 포함한다. 이 공정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만드느냐가 기업의 이익의 크기를 결정짓는 요인이 된 것이다. 그 핵심에 선 것이 바로 디지털이다.

그간 세계를 주도해 온 대부분의 기업은 규모의 경제와 독과점 속에 이익을 향유해 왔다. 막대한 자본과 집약된 기술력을 기반으로 한 비용 장벽이 곧 시장 진입 장벽이 돼 왔다. 시장 진입 자체가 어렵다 보니 일단 정점에 올라선 기업들은 오랫동안 선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의 시대에 이러한 장벽은 스멀스멀 허물어지고 있다. 디지털의 축복인지 몰라도 비용의 장벽은 점차 낮아지고 있다. 독과점적 지위도 무기가 되지 못하면서 새로운 시장 진입자들의 공세는 더욱 거세진다. 경쟁 강도도 그 만큼 세지고 있다. 특히나 불황과 불확실성에 대한 무서움의 크기가 커지면서 레거시 기업들이 겪는 위기의 정도도 커진다.

지난해 이맘때 선물로 받아 묵혀뒀던 책 한권을 최근 다시 꺼내 읽고 있다. EY한영에서 펴낸 '수퍼플루이드 경영전략'이다. 초(超) 디지털 시대에 대비하기 위한 기업들의 전략서다. 수퍼플루이드라는 낯선 개념이 최근의 상황을 잘 대변해 준다. 수퍼플루이드는 물리학 용어다. 움직이는 동안 마찰이 전혀 없어 운동에너지를 잃지 않는 액체인 '초유체'를 의미한다고 책은 설명한다. 이를 경제·산업적으로 해석하면 중개나 유통 단계를 넘어서 사실상 거래 비용이 '제로(0)'가 되는 상태를 말한다. 산업과 산업을 연결해 온 중개 과정이나 밸류체인 자체가 허물어지면서 거래 비용도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생산과 소비에 이르는 과정 자체에 대대적인 변화가 생기는 셈이다. 이러한 수퍼플루이드를 가능하게 하는 게 바로 디지털이고, 그 중심에는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등의 기술이 자리 잡고 있다. 현대차의 경쟁자는 GM이나 도요타일까 아니면 구글이나 다이슨과 같은 혁신 IT 기업일까. 이마트의 경쟁자는 롯데마트나 홈플러스일까 아니면 배달의 민족일까.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 이 문제를 풀어줄 것 같다. 기업들에 디지털은 선택이 아닌 숙명이 됐다. (기업금융부장 고유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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