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쥐는 영리해 꾀가 많다. 특히 부지런하다. 하루에 자기 체중의 4분의 1을 먹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니 부지런하지 않으면 배겨날 수가 없다. 십이지(十二支)의 열두 동물 가운데 쥐가 가장 앞에 오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십간(十干)에서 경(庚)은 신(辛)과 함께 흰색을 상징한다. 그래서 2020년 경자년(庚子年)은 '흰 쥐'의 해다. 흰색은 우두머리를 나타낸다. 부지런함으로 볼 때 쥐 중에서도 으뜸인 흰 쥐의 해인 셈이다.

기업들은 경자년을 맞아 이런 의미를 되새기며 "좀 더 부지런히 뛰자"고 의지를 다지고 있다. 새해가 되면 기업들이 늘 해 오던 말이지만, 올해는 예년과는 많이 다른 것 같다. 경기 전망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패러다임의 급격한 변화로 산업계의 생태계와 지도도 바뀌고 있다. 까딱하다간 도태되기 십상인 시대가 돼 버렸다. 기업 입장에서는 생존 자체가 목표가 됐다. 생존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한 발 더 뛰는 수밖에 없다. 부지런히 신사업을 탐색하고 추진하는 길만이 대안이 돼 버렸다. 경제가 단기간에 반등할 것이란 기대는 크지 않다. 그래서 기업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상상보다 크다.

기업들은 뭐라도 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다. 고꾸라진 실적을 회복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심정이다. 지난해 상장 기업들의 영업이익은 40% 가까이 급감했다. IFRS 회계기준이 도입된 이후 최대 폭으로 감소했다. 실적 악화는 기업들의 손발을 묶는 족쇄가 된다. 이윤을 내기 위해서는 투자가 선행돼야 한다. 벌이가 있어야 투자도 하겠지만 실적이 급감하면 그 여력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래도 선제적인 투자를 포기할 순 없다. 결국 외부에서 돈을 더 빌려야 한다. 아쉬운 소리를 더 들어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결국은 신용이 중요한 시대로 다시 돌아왔다. 신용도가 좋은 기업들이야 은행에서건 금융시장에서건 자금 조달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적이 악화하고 신용도가 저하된 기업들은 이중고를 겪을 수밖에 없다. 아쉬운 소리를 들어야 할 기업들은 더 많아졌다. 한국기업평가와 한국신용평가가 분석해 내놓은 결과를 보면 명확하다. 한기평이 지난해 신용등급을 내린 기업은 21곳이었다. 2017년 14곳, 2018년 12곳과 비교하면 대폭 늘었다. 신용등급이 오른 기업이 13곳이었던 것과 비교해도 많다. 한신평은 지난해 20곳의 기업 신용등급을 내렸다. 2017년과 2018년에 10곳이었던 것에서 두 배 더 늘어난 결과다. 신용등급이 오른 기업은 2017년과 2018년 각각 19곳과 20곳이었지만 지난해에는 14곳으로 줄었다.

현대자동차그룹과 두산그룹, 롯데그룹, CJ그룹, LG그룹 등 그간 대한민국 경제를 뒷받침했던 대기업그룹의 주요 핵심 계열사의 신용등급이 내렸거나 앞으로 내릴 가능성이 커졌다. 신용평가사들은 지난해와 같은 신용등급 하향 기조가 올해도 계속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만큼 상황이 녹록하지 않을 것임을 예측하고 있다. 실적 개선 못지않게 재무구조의 개선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고 '독촉'하고 있다. 긍정적인 시그널이 보이지 않는다면 가차 없이 신용등급을 내리겠다고 한다.

신용등급 한 노치(notch)에 따라 기업들이 부담해야 할 이자 비용은 일 년에 수십억 원이 왔다 갔다 한다. 조단위의 조달을 해야 하는 기업들 입장에서는 그 비용 부담이 더욱 커진다. 기업 입장에선 신용등급은 현실적 문제다. 유휴자산을 팔아 유동성을 확보하고 계열사들을 쪼개고 합치고, 경우에 따라서는 팔아야 하는 이유도 재무구조 개선의 핵심인 신용등급을 높이기 위해서다. 이러한 현상은 올해 더욱더 많아질 것 같다. 단기간에 실적을 좋게 할 여력이 크지 않기 때문에 다른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 결국은 구조조정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초저금리가 지속하고 있는 상황이 기업들엔 착시를 유발할 수도 있다. 신용등급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이전보다 회사채 시장에서 자금을 빌리기는 어렵지 않다. 초저금리와 풍부한 유동성 때문이다. 하지만 독이든 사과가 될 수 있다. 기업들엔 부지런함 못지않게 영리함도 중요하다. 신용도 저하의 시대에는 그 영리함을 재무구조 개선에 써야 한다. 제때 움직이지 못해 한 방에 훅 간 기업들이 여럿 있다는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때다.

(기업금융부장 고유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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