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연의 전망대>재벌 1세대 시대의 마감과 '스튜어드십코드'
<배수연의 전망대>재벌 1세대 시대의 마감과 '스튜어드십코드'
  • 승인 2020.01.20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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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인포맥스)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19일 향년 99세로 영면에 들었다. 고인은 마지막 1세대 대기업 오너였다. 껌사업을 시작으로 123층 규모의 국내 최고층 빌딩을 세우는 등 사업수완도 탁월했다. 그는 젊은 시절 작가를 꿈꾸는 인문학도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룹의 이름인 '롯데(Lotte)'도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소설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여주인공인 샤롯데(혹은 샤를롯데)의 애칭 정도로 알려졌다.

신격호 명예회장의 별세로 재벌 1세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제 국내 대기업 모두가 부모 잘 만나서 오너 자리에 오른 재벌 2세 혹은 3세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는 의미다. 재벌 2세 혹은 3세들은 해외 유학 등을 통해 글로벌 경제에 대한 식견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위기를 관리하는 경영 능력에 대해서는 검증받은 바가 없다.

재벌 2세 혹은 3세가 해당 기업을 제대로 경영하기를 기대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확률적으로 그렇다는 의미다. 재벌 2세는 우리나라 인구 5천만명 중에서도 재벌 아버지를 둬야 하니 5천만분의 1의 확률을 충족해야 한다. 여기에다 아버지의 3억마리 정자 가운데 하나가 어머니의 난자와 만난 결과물이니 3억분의 1의 확률도 감안돼야 한다.재벌 3세라면 셈법은 더 복잡해진다. 할아버지의 3억마리 정자 가운데 하나가 할머니의 난자와 만나 태어난 재벌 2세 아버지를 둬야 한다. 다시 재벌 2세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과물인 재벌 3세도 3억분의 1의 확률이다. 모든 조건을 충족해야 하니 5천만분의 1 곱하기 3억분의 1 곱하기 3억분의 1로 천문학적인 확률이다.

오마하의 현인인 워런 버핏은 이를 '정자로또'라고 지적했다. 자신이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확률이 로또에 당첨될 확률보다 작다는 점을 수리적으로 풀이했다. 자서전인 '스노우볼'에 따르면 버핏은 자신의 천문학적인 재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줄 생각이 없고 그의 자녀와 손자들도 물려받을 자격이 없다고 교육받았다.

최근 국내 대기업의 상황만 살펴보면 수리적 해석에 밝은 버핏이 옳았던 것 같다. 어떤 기업 오너의 2세는 상속세를 제대로 내지 않으려다가 불법 시비에 휘말렸고 어떤 기업 오너의 3세는 마약 투약 혐의를 받아 투옥되기도 했다. 하청업체로부터 술값 명목으로 비자금을 받아 챙긴 재벌 2세가 있는가 하면 자회사를 통해 밀수를 일삼는 재벌 3세도 있었다. 피를 나눈 재벌가 형제끼리 재산 다툼을 벌이며 원수처럼 지내는 일은 다반사가 됐다.

재벌 2세와 3세가 이끄는 대기업이 국내 경제의 시스템 리스크 요인이 될 지경이다. 김일성의 백두산 혈통을 내세워 3대 세습을 이어가는북한 체제의 정당성이 의심받는 것과 같은 이치다.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수탁자책임 원칙)가 새삼 중요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튜어드십코드는 연기금과 자산운용사 등 주요 기관투자가가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steward)'나 '마름'처럼 행동하라는 위탁이다. 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 참여해 주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위탁받은 자금의 주인인 국민이나 고객에게 이를 투명하게 보고하도록 하는 행동지침이다.

국민연금공단 등 국내 기관 투자자들은 이제부터라도 재벌 2세와 3세가 경영하는 기업에 대한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한다. 재벌 2세와 3세 오너의 일탈이나 판단 착오가 시스템 리스크로 이어져 주주권을 훼손할 수도 있어서다. 재계와 일부 학자 등은 소튜어드십 코드 등에 따른 주주권 행사를 두고 이른바 '연금사회주의'라며 반발하지만 설득력이 부족하다.







해외 연금이 대주주로 있었다면 일부 국내 재벌2세와 3세는 벌써 퇴출됐다. 특히캘리포니아 공무원 연금 시스템(이하 캘퍼스:Calpers)이 운용하는 '포커스 리스트 프로그램(Focus List Program)'의 기준에 따르면 일부 대기업 경영진은 벌써 교체됐을 것이라는 게 금융권의 한결같은 의견이다. 캘퍼스는 이사회의 역량과 다양성,지배구조,독립성 등 지속 가능성에 연관된 이슈에 집중해서 포커스리스트프로그램을 지난 1987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사회책임투자(ESG:Environment- Social-Governance)에 대한 기업보고서의 투명성 등도 중요한 관전 포인트다. 의결권 행사와 감독 조건 등 주주의 권리에 대한 부분도 캘퍼스는 적극 개입한다.<본보 2019년 1월29일자 '캘퍼스와 연금사회주의'기사 참조>

대한민국은 주주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주주가 기업의 주인이라는 의미다. 주주가 주식을 맡긴 마름 혹은 집사에게 정당한 권리를 확보하라는 촉구는 자본주의의 본령이다. 재벌 2세와 3세 등은 이제 진짜 실력을 증명해야 할 때가 됐다. 실력이 없으면 한 줌도 안되는 지분만큼만 경영권을 인정받는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세상이 변했다.(취재부본부장)

ne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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