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피터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사진)는 인문경영학의 아버지로 소개된다. '마케팅'이라는 단어를 창시한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경영학 서적에 너무 자주 등장해 지겨울 정도다. 방대한 저술활동을 펼쳤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소개한 위대한 스승이라는 의미다.

현대 경영학의 구루(Guru:자아를 터득한 신성한 교육자)인 피터 드러커도 대공황 시절 미국 이민국의 하급 사무관으로 특채될 뻔했다. 100여권에 이르는 피터 드러커의 역작 가운데에도 백미인 그의 자서전에 소개된 일화다.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8년 그는 미국 이민국 사무관으로부터 특채 제의를 받았다.







"그러니까 당신은 작년에 1천800달러밖에 못 벌었다는 말이군요. 쥐꼬리만한 박봉이군요. 안 그런가요? 게다가 이렇게 적은 연봉으로 당신이 해야 하는 이 많은 일을 보세요. 당신은 공무원 생활이 어떻다는 것을 알겁니다. 그리고 대학 졸업장도 갖고 계실 테고요. 거기다 외국어도 하시잖아요! 당신이 이민국에서 일하면 첫 달부터 50퍼센트 더 많은 급료를 받을 수 있어요. 만약 당신이 지금 이 서류를 작성한다면, (중략) 당신이 유럽에서 돌아올 무렵이면 우리는 당신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놓고 기다리고 있는 상태가 되어 있을 겁니다." 당시 아일랜드인의 인상에 브루클린 억양을 사용했던 중년의 이민국 사무관은 피터 드러커에게 연민과 공감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그 사무관이 드러커의 사정을 딱 하게 여겨 아무런 대가도 없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소개했기 때문이다.

드러커는 그의 자서전에서 그 사무관은 프랭클린 D 루즈벨트의 미국, 1930년대 뉴딜정책의 시대이자 순수의 전성기에 대한 상징으로 남아있다고 회고했다. 이밖에도 그의 자서전 말미에는 대공황을 퀀텀점프로 승화시킨 미국 뉴딜정책의 진수가 '서로 돕기'였다는 일화가 여러 개 소개돼 있다.

드러커는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는 자세가 대공황에 대한 미국인만의 대처법이었다고 평가했다. 유럽 등 다른 나라에서 의심과 무뚝뚝함, 두려움, 질시만 더 깊었졌던 것과 차별화됐다는 게 드러커의 진단이다. 그는 뉴딜 정책의 핵심도 도우면서 살아가는 자세를 미국 사회의 가치관으로 확립한 데 있다고 강조했다.

2005년 영면한 피터 드러커가 살아서 지금 한국을 봤다면 어땠을까. 그가 지금 우리를봤다면 1930년대말 뉴딜의 정신이 한국에서 부활했다고 평가하지 않았을까. 충남 아산,충북 진천,경기 이천 주민들은 '코로나19' 감염 공포에 떨고 있는 중국 우한 지역 거주 교민들을 조건없이 보듬어줬다. 초반에 입소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등 약간의 혼선이 있었지만 '찻잔 속의 태풍'에 머물렀다. 대부분 지역 주민들이 연대와 공감을 바탕으로 우한 교민들을 더 크게 환대했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 권위의 영화제인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해 4관왕을 차지한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도 이점에 주목했다. 봉감독은 지난 16일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하면서 "코로나바이러스를 훌륭하게 극복하고 있는 국민들께 제가 박수를 쳐 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고 말했다. 평소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와 공감을 유독 강조해온 봉감독 다운 귀국 소감이라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회복 조짐을 보이던 국내 경기가 코로나19 여파 등으로 다시 어려워질 전망이다. 어려울 때 공동체가 서로의 간격을 좁히고 각자가 상대방의 구원자가됐던 1930년대 말 미국의 뉴딜 정신을 되짚어 보자. 세계적 지성인 피터 드러커 등에 따르면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 됐던 출발점은 대공황이후 뉴딜정책의 연대와 공감에서 비롯됐다. 반도체와 2차전지의 나라인 우리도 연대와 공감을 바탕으로 한번 더 도약할 수 있다. (취재부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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