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연합인포맥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재정위기가 극에 달한 2012년 7월 26일,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영국 런던에서 열린 글로벌 인베스트먼트 콘퍼런스 연설에서 세계 금융시장 역사에 남을 만한 말을 한다.

"ECB가 가진 권한으로 ECB는 유로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할 준비가 돼 있다. 그리고 나를 믿어달라. 그것은 충분할 것이다" (Within our mandate, the ECB is ready to do whatever it takes to preserve the euro. And believe me, it will be enough)

2011년 11월 드라기 총재가 ECB의 수장을 맡았을 때 유로존은 그리스발 금융위기를 겪고 있었다. 상황은 계속 나빠져 유로존이 해체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왔다.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하고 그리스의 옛 화폐인 드라크마로 복귀할 수 있다는 추측도 가득했다. 부채 상황이 좋지 않은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유로존을 탈퇴해 지속 불가능한 차입 비용을 자국 화폐로 갚아나갈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생겨났다.

이후 드라기 총재가 이끄는 ECB는 전례 없이 완화적인 통화 정책을 이어간다. 마이너스 금리와 무제한 국채 매입프로그램(OMT), 장기대출(LTRO)을 선보였다.

'아무런 정책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비난과 '유로존을 구한 슈퍼 마리오'라는 찬사를 동시에 받으며 드라기 총재는 지난해 10월 말 8년의 임기를 마치고 물러났다. 후임은 ECB 사상 첫 번째 여성 수장인 라가르드 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다.

약 8년 전 드라기의 그 세 단어, 필요한 모든 조치(whatever it takes)가 다시 거론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지금이 'Whatever It Takes Moment'라는 것이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이나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와 비교되던 코로나19는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번졌고, 선진국 경제, 이머징마켓 할 것 없이 강타하고 있다. 폐쇄, 격리 조치가 잇따르다 보니 이제는 공급망 붕괴에서 수요 붕괴도 엿보인다. 금융시장에서는 퍼펙트스톰이 나타나고 있다.

세계의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가장 먼저 움직였다. 지난 3일 정례회의와 별도로 50bp의 금리를 전격적으로 인하해 시장을 달랬다. 캐나다 중앙은행(BOC), 영란은행(BOE)도 50bp 인하로 뒤따랐다.

긴급 금리 인하 이후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미국에서 코로나19 확진 사례는 미미하지만, 현재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 악영향을 아주 면밀하게 모니터링하고 있다. 필요할 경우 모든 조치를 할 것이다. 연준은 전 세계 어느 중앙은행보다 효과적이고 많은 경기 부양 정책 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찰스슈왑의 캐시 존스 수석 채권 전략가는 이에 대해 "이런 환경에서 유동성을 늘리는 게 병을 치료하거나 백신을 생산하거나 사람들이 극장이나 상점에 가도록 하지 못할 것이라는 인식은 꽤 널리 퍼져있다. 신호를 주려는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드라기 총재가 엄청난 유동성을 공급하겠다는 'whatever it takes'와 같으며 그것은 괜찮다"고 평가했다. 존스 전략가는 트레이더 출신으로 저 자리에 오른 월스트리트의 여성으로는 신화 같은 존재다.

이번주 목요일 ECB의 정책 회의를 앞두고 제퍼리스의 브래드 베체텔 외환 글로벌 대표는 "라가르드 총재가 'whatever it takes' 순간으로 결심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예금금리 10bp 인하에다 TLTRO에 변화를 주거나 순자산매입을 늘릴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전망이다.

알리안츠의 엘-에리언 수석 경제 자문은 "전 세계가 빠르게 whatever it takes 모드로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세계 중앙은행에 이어 각국 정부도 나서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매우 극적인 조치'를 발표할 계획이라고 예고했다. 유럽연합(EU)은 코로나19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250억 유로의 EU 기금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독일도 균형 재정 규정을 없앨 것이라고 시사해 적자 재정 가능성을 키우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필요하다면 무엇이든(whatever) 할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이탈리아는 코로나19의 경제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지출 계획을 공개했고, 관리들에 따르면 주세페 콘테 이탈리아 총리도 'whatever it takes'라는 단어를 꺼내기도 했다.

영국 리시 수낙 재무장관 역시 경제를 부양하기 위해 "I will do whatever it takes"라고 언급했다.

월가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드라기의 순간이 왔다고 진단했다. 시장은 whatever it takes 메시지를 원하고, 정부는 행동해야 할 때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 세 단어에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제적 난관에서 빠져나오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위기 속 절박함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V'자형 반등이 아닌, 처음에는 가파른 'I'자형에서 시간이 지나면 기나긴 'L'자로 느껴지는, 글로벌 경제의 'U'자형 긴 터널이 시작됐다. (곽세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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