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연합인포맥스) 마이너스 금리에 이어 마이너스 유가도 현실이 됐다. 돈을 빌리면서 오히려 돈을 받고, 돈을 얹어줄 테니 원유를 가져가라는 이상한 세상에 살고 있다. 기존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마이너스 금리는 유럽중앙은행(ECB)과 일본은행(BOJ) 등 전세계 중앙은행들의 정책에 순응한 측면이 크다. 이와 달리 비교적 자유로운 시장에서 거래되는 원유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등 카르텔의 통제에 저항하고 있다.

20일 미국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5월 인도분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선물은 배럴당 -37.63달러에 거래됐다.

천연가스와 전기 선물, 일부 불명확한 지역의 원유 선물에서 마이너스 가격이 발생한 적은 있지만, WTI와 같은 대표적인 원유 계약에서 마이너스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상 첫 마이너스 국제유가가 다른 금융 이슈를 누르고 헤드라인을 장식한 이유다.

WTI 선물 계약의 본거지인 선물 공룡 CME도 최근까지 마이너스 유가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가격 흐름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자 마이너스에 대비, 이번달 초에야 WTI가 마이너스를 기록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변경했다.

사실 유가가 하락할 수밖에 없는 여건은 충분했다.

연초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의 저유가 전쟁에다 미국의 셰일 급증 등 원유 공급은 넘쳐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가솔린부터 항공기유까지 수요가 완전히 실종됐다. 재고 처리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저장할 곳도 한계치에 다다랐다.

이것이 1차 원인이지만, 월가에서는 파생상품과 투기 세력도 단단히 한몫했다고 지적한다. 많은 트레이더는 마이너스 유가가 과연 가능할까에 대해 의문을 던지면서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유가를 두고 치열한 수익률 경쟁은 이미 시작됐다. 헤지펀드와 사모펀드, 기금 등은 원유 저장소가 조만간 용량 한계에 도달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저장 탱크 임대에 나섰다. 2008년 유가 급락 때 저장고 가치는 크게 뛰었던 학습경험이 있던 이들은 탱크를 거의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개인들은 2~3월 유가가 가파르게 떨어지자 저가 매수 기회라고 봤다. 마침 선물계좌를 열지 않아도 손쉽게 원유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상장지수펀드(ETF)라는 상품도 있었다.

WTI 선물을 벤치마크로 삼는 미국 대표 원유 ETF인 USO로 자금은 밀려들었고, 지난주 사상 최대 운용 규모를 기록했다. 이 ETF는 스팟 가격에 가장 가까운 근월물 계약을 우선 보유한다.

투자자들은 원유 가격이 내재 가치와 비교해 너무 싸다는 면을 봤지만, ETF는 실제 현물 원유를 받을 수 없는 금융상품이다. 그런데 만기일이 되면 이 종이 석유는 현물 석유로 변한다.

WTI 5월물 전체 물량의 25%를 보유하고 있던 USO는 만기가 다가오면서 5월물을 대거 던졌다. WTI가 마이너스로 떨어진 20일에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폭증한 재고, 저장 용량 쟁탈전까지 더해진 상황이라 이 매물을 받아줄 주체가 없었고, 마이너스라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게 됐다.

원유 실물을 받아 보관만 할 수 있다면 원유에다 배럴당 37달러를 받고, 연말께 30달러에 팔아 67달러의 마진을 남길 수 있었었다는 단순 계산도 나온다.

4월 중순 무렵 WTI 5월물과 6월물의 콘탱고는 30%까지 벌어지는 등 경고음은 울리고 있었다. 투기 세력이 지나치게 무리해서 5월물을 누르는 선물 플레이에 나섰고, 슈퍼 콘탱고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원유 ETF는 WTI 선물을 추종하기 때문에 만기가 가까워지면 근월물을 팔고 차기월물이나 원월물을 사들여야 한다. ETF의 콘탱고 손실이다. 누군가는 사야하는 그 포지션과 반대로 콘탱고를 이용해 엄청난 이익을 얻었을 수 있다. 콘탱고가 벌어져 롤오버 비용, 괴리율 등의 문제도 발생했다.

포브스는 WTI와 브렌트 기준의 유가 차이가 크게 벌어진 것도 파생상품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브렌트는 물론 싱가포르, 사우디아라비아, 브라질 등에서 유가는 마이너스로 내려가지 않았다. ETF는 WTI로 거래되지만, 브렌트로는 되지 않는다. 미국 원유시장과 선물시장, ETF 활용이라는 조합이 격렬한 WTI에 한몫했다는 것이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WTI 웩더독 여파는 지속하고 있다. 마이너스 유가 충격으로 차기 선물은 물론 브렌트유, 현물 가격도 영향을 받고 있다.

의혹도 꼬리를 물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미국의 유명 석유 재벌은 CME 규제기관인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에 시장 조작 가능성, 시스템 고장이나 컴퓨터 프로그래밍 실패가 제로 이하로 가격 하락을 초래했는지 여부를 조사해달라는 공식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2018년 2월 '볼포칼립스'로 불리는 VIX 사태 등 다양한 파생 금융상품들이 시장 가격을 교란하는 사태 등은 많았다. 이번 마이너스 유가도 그 하나로 분류될 수 있다. 또 언제든 만기일 전후로 이런 일이 발생할 수도 있게 됐다. 마이너스 금리가 그랬던 것처럼 마이너스 유가도 뉴노멀이 될 수 있다. (곽세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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