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상장 기업들의 올해 1분기 성적표 공개가 모두 끝났다. 바이러스가 바꿔놓은 일상의 변화는 기업들의 실적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기업들에 2020년 1분기는 암울한 시대로 기억될 것 같다. 국제유가 급락에 더해 심각한 수요둔화를 겪은 정유사는 4조원이 넘는 적자를 냈다. 하늘길이 막혀 비행기도 못 띄운 항공사들은 적자투성이다. 오프라인 유통기업과 면세점, 외식업체, 멀티플렉스 영화관들은 역대 최악의 성적표를 내놨다. 수출 급감에 실적이 고꾸라진 자동차 업계는 한숨을 쉰다. 적자를 면한 기업들도 어닝쇼크를 피할 수 없었다.

그나마 전 세계에서 경제활동을 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국가였지만 바이러스가 던진 충격은 컸다. 그런데도 진짜 위기는 비로소 이제야 시작될 것이라는 경고가 잇따른다. 올해 1분기는 전초전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정부가 나서 유동성을 풀어 총수요를 진작하고, 신용경색 우려의 길목만 차단해 주면 움츠렸던 몸을 다시 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사그라든다.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다. 누구도 가보지 못한 예측 불가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깨닫기에 불안은 더욱 크다. 새로운 표준과 규범인 '뉴노멀(New Normal)'에 기껏 적응했더니 여기에 불확실성까지 가미된 '뉴애브노멀(New Abnormal)'의 시대가 코 앞이다.

코로나 19 이후의 세계 경제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예측도 넘쳐난다. 불확실성의 강도가 적지 않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V·U·Z·W·L 등 알파벳 대문자가 총출동하고, 나이키 브랜드를 빗댄 스우시(Swoosh) 마크도 등장한다. L자형 전망을 제외하고는 속도와 시기에 따라 부침이 있지만, 모두가 경제가 회복되는 쪽으로 예측한다. 공포와 불안 속 일말의 기대일까.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지금이 저점일 것이란 기대도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시작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는 스우시 모형으로 반등했고, 오일쇼크 때는 V자형의 급반등 성장세로 돌아섰다. 경제주체들의 심리 속에는 그때를 기대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I자형의 극단적 추락도 가능하다고 전망하는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 같은 사람도 있다. 바이러스 종식에 대한 확신이 없는 한 사실상 무의미한 예측들이다.

코로나 19 이후 급격하게 바뀔 전 세계 경제 질서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기업들은 주시하고 있다. 혁신과 창의력에 자본력을 더한다고 뉴애브노멀의 시대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이젠 모두 알고 있다. 홀로 열심히 뛴다고 수익 확보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세계 경제의 새로운 변화와 부침에 따라 기업의 생성과 소멸은 더욱 가속할 것이다. 그간 한국 경제를 이끌었던 다자주의와 자유무역주의를 기반으로 한 수출은 쉽사리 회복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미 세계 경제의 질서는 보호주의로 흘러갈 조짐을 보인다. 리쇼어링과 인소싱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표하는 말처럼 회자된다. 나의 생존을 위해 상대를 죽일 수 있다는 극단적 보호무역주의는 우리 경제에 독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 경제의 방향키를 쥔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코로나19 이후 전 세계는 막대한 규모의 유동성을 쏟아내고 있다. 우리 정부도 비상경제를 선포하고 대규모 자금을 공급하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를 대비한다며 '한국판 뉴딜'을 꺼내 들고 추가적인 재정 투입도 준비 중이다. 사실상 제로 수준으로 떨어진 금리가 경기회복을 이끄는 좋은 수단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재정은 위기 극복의 거의 유일한 대안이 돼 버렸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현재로선 재정투입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없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를 대비한 촘촘한 엑시트 전략(출구전략)도 필요하다. 특히 재정 소요 증가에 따른 정부의 부채 증가와 기업들의 채무 확대가 또 다른 위기 요인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2014년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통화은행연구센터(ICMBS)가 경제전문가들에 의뢰해 작성한 '제네바 보고서'는 위기 이후 경기 회복을 저해하는 요소로 성장과 레버리지 사이의 악순환을 꼽았다. 과도하게 늘어난 채무를 상환하다 보면 경기는 둔화하고, 성장의 역동성은 떨어져 위기 이후 필연적으로 해야 할 디레버리징의 과정이 더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비용 투입을 야기함으로써 되레 경기 위험을 더욱 키울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일견 딜레마 같은 상황이지만 세밀한 조율과 대비가 사전에 필요하다. 코로나19 이후 드라마틱한 성장세가 나타난다면 디레버리징의 시간은 벌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위기의 상시화는 불가피할 수도 있다. 대규모 재정을 투입하는 한국판 뉴딜만큼이나 포스트 코로나를 대비한 산업구조 혁신도 필요하다. 유동성 주사를 맞아 기껏 살아난 기업들이 위기 이후 디레버리징 과정에서 다시 어려워질 수도 있다. 산업구조조정이 아닌 산업구조혁신을 위한 정부와 기업의 협업이 필요하다.

(기업금융부장 고유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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