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IT시스템' 부담에 첫 입찰 유찰 후 재공고



(서울=연합인포맥스) 정지서 기자 = 국민건강보험공단(이하 건보공단)이 70조원의 자금을 통합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설립 이래 처음으로 주거래은행 선정에 나섰지만, 은행들이 손사래를 치고 있다.

조건에 맞는 예금금리를 제공하기 어려운 데다 건보공단이 요구하는 차세대 가상은행 시스템을 구축·관리하려면 사실상 '역마진'을 감수해야 해서다.

8일 금융권에 따르면 건보공단은 오는 9일부터 13일까지 주거래은행 사업자 선정을 위한 입찰에 돌입한다. 최근 첫 입찰이 유찰된 이래 두 번째 입찰이다.

그간 건보공단은 IBK기업은행이 협약 없이 주거래은행 역할을 해왔다. 공단과 지사의 입출금 모니터링과 보험료 관리, 예치자산 매매 등을 수행하는 가상은행 시스템도 기업은행과 IT 개발사 웹캐시·이음이 3년 단위 계약을 통해 전담해왔다.

건보공단은 70조원에 달하는 자금의 통합적인 관리를 위해 이번에 주거래은행 도입을 추진했다. 저금리 시대가 장기화하는 만큼 건강보험 보유자금 운용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작년 건보공단이 공개경쟁입찰을 통한 주거래은행 체제로의 전환을 은행권에 타진했을 때만 해도 은행들은 이번 입찰이 올해 기관영업의 최대어가 될 것으로 봤다.

4대 사회보험료와 정부지원금 수납 업무, 각종 보험급 지급 업무를 하다 보면 5천139만명의 건강보험 가입자를 잠재 고객으로 둘 수 있어서다. 하지만 입찰 공고가 난 이후 시중은행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제안서에 담긴 요구가 과도해서다.

100점 만점의 건보공단 주거래은행 제안서 평가항목 중 점수 비중이 큰 항목은 '자금집행 및 업무지원'(33점)과 '시스템구축'(30점) 이다.

이중 시스템구축에 포함된 세부항목인 '차세대 가상은행 시스템의 설치계획과 시스템 지원'에 대한 배점이 단일 항목 중에선 20점으로 가장 크다. 건보공단은 동점의 입찰은행이 나올 경우 이 항목의 배점이 큰 은행을 선택할 계획이다. 그만큼 최우선 조건이란 뜻이다.

건보공단은 주거래은행이 구축해야 할 건강보험 맞춤형 차세대 가상은행 시스템이 공단 재정의 통합관제 모니터링은 물론 실시간 빅데이터 분석까지를 고려한 시스템으로 구성할 것을 요구했다. 금융·수납·지급관리는 물론 자금 운용, 임직원 경비처리를 모두 지원해야 한다.

오픈뱅킹과 핀테크 등 IT 신기술이 모두 적용된 통합 플랫폼은 3년에 걸쳐 구축돼야 한다. 빅데이터를 활용한 자금관리·운용 플랫폼, 법인카드 경비처리를 위한 카드 관리 시스템도 포함이다. 5년간의 계약 기간 내 회계와 자금, IT를 담당한 전문 인력도 상주시켜야 한다.

은행마다 차이는 있지만, 차세대 가상은행 시스템 구축·관리 비용은 최소 500억원에서 700억원가량의 비용이 들 것으로 분석됐다. 최근 출연금 등 협력사업 명목의 비용을 선제로 손상 처리할 것을 권고한 금융감독원의 지침을 고려하면 은행으로선 당장 수백억 원의 비용 처리를 부담해야 하는 셈이다.

15점이 배점된 예금금리 항목도 부담이다. 건보공단은 수시입출금식 예금(MMDA)에 대한 우대금리를 입찰은행에 제시하도록 했다. 예치 기간과 금액 제한 없이 상시로 적용되는 특별금리(기준금리±α)를 얼마로 제시하느냐에 따라 은행의 순위가 달라진다.

물론 대규모 자금을 상시로 유치할 수 있다면 특별금리도 가능하다.

하지만 건보공단이 내세운 자금 규모 70조원 중 MMDA 연 평잔규모는 지난해 말 기준 7천864억원이다. 같은 기간 보통예금과 MMDA를 제외한 정기예금·펀드 등 중장기 운용자금은 19조원으로 매년 3조원씩 줄어드는 추세다.

이에 뒤늦게 주거래은행 체제로 전환하려는 건보공단이 달라진 은행권의 분위기를 반영하지 못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행정안전부를 시작으로 금융당국도 지방자치단체 금고은행과 법인 주거래은행을 둘러싼 은행권의 과당 경쟁을 제한하고 있는 데다, 지나친 출혈경쟁의 폐해를 뒤늦게 인정한 은행들 스스로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는 반성의 목소리를 내놓고 있다.

건보공단은 한 차례 유찰에도 조건 변경 없이 주거래은행 선정 재공고를 냈다. 은행권에선 두 번째 입찰 역시 유찰될 가능성이 조심스레 점쳐지고 있다. 결국 기업은행이 수의계약을 통해 기존 사업자 지위를 유지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건보공단은 입찰 참여자가 나오는 대로 오는 15일 제안서 평가를 통해 우선협상자를 선정할 방침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연 8천억원 규모의 예금을 유치하려고 수백억원의 비용을 쓸 은행이 어디 있겠느냐"며 "법인카드 사용 적립률, 임직원 대출한도 모두 차등화해 적시하도록 했는데 과도한 요구 조건"이라고 지적했다.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주거래은행 유치에 아낌없이 돈 쓰던 시절은 갔다. 지금은 은행마다 충당금 쌓고 비용 줄이기가 핵심이다"며 "시금고 등 잘못된 선례가 기관에 잘못된 인식을 심어준 결과다. 기관영업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고 했다.

jsje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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