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이윤구 기자 =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별세 소식에 황망한 마음을 금할수 없다며 애도와 아쉬움을 드러냈다.

허창수 회장은 25일 '당신은 영원한 일등이십니다'로 시작하는 추도사를 통해 "대한민국 경제계의 큰 어른으로서 우리 기업이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 주시고 사회의 아픈 곳을 보듬어 주시던 회장님이셨다"며 "반도체 산업을 이 땅에 뿌리내리고, 대한민국 미래 먹거리를 만들어 사업보국을 실천하신 기업인이었다"고 이건희 회장을 추억했다.

그는 "1970년대 두 차례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자원이 부족한 한국이 살길은 바로 부가가치가 높은 반도체 산업이라는 확신을 얻고 사업을 결심하셨다"며 "하지만 불확실성이 크고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사업이기에 그룹 차원의 추진이 어렵게 되자, 직접 사재를 털어 작은 반도체회사를 인수해 사업을 추진했다"고 회상했다.

반도체를 향한 이건희 회장의 열정과 노력은 1983년 삼성의 반도체 사업진출이라는 결실을 보았다.

허 회장은 이건희 회장을 선택의 갈림길에서 결단력과 리더십을 발휘한 승부사로 평가했다.

그는 "1987년 4메가 D램 개발방식에서 회로를 위로 쌓는 스택으로 할 것인가 밑으로 파는 트렌치로 할 것인가 아무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이건희 회장은 스택으로 하라고 지시했다"며 "위로 쌓는 방식이 단순하고 문제가 생겨도 쉽게 고칠 수 있다 하며 결단을 내리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건희 회장은 1993년 초 반도체 집적회로를 만드는 웨이퍼의 크기를 6인치에서 8인치로 키워 양산하라고 지시했다.

실패하면 1조원 이상의 손실이 예상돼 주변의 반대가 심했지만, 성공하면 생산량을 2배로 늘릴 수 있다며 세계 1위가 되기 위해 과감한 투자를 결정했다.

같은 해 일본의 경쟁사와 16메가 D램을 동시에 개발했지만, 8인치 웨이퍼의 막강한 생산량을 바탕으로 일본을 따돌리고 1993년 10월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로 우뚝 서게 됐다.

허 회장은 "이건희 회장은 '변해야 살아남는다'고 외치던 개혁가였다"고 평가했다.

이건희 회장은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이른바 '신경영 선언'을 했다.

국제화 시대에서는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가 된다며 68일 동안 1천800명의 임직원과 간담회도 진행했다.

신경영을 선언한 지 20년이 되던 2013년 6월에는 "앞으로 우리는 1등의 위기, 자만의 위기와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한다. 자리에 머물지 말고 앞서서 달려가자"고 설파했다.

허 회장은 이건희 회장이 품질에 있어서 타협하지 않는 완벽주의자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1995년 삼성전자 구미공장에서의 '불량제품 화형식'은 아직도 생생하다"며 "무선전화 제품출시를 서두르다 불량률이 높아지자, 불량을 근절하자는 회장님의 단호한 의지 하에 15만대의 무선전화기들이 불구덩이 속으로 내던져졌다"고 말했다.

허 회장은 "'이제는 양에서 질로 전환하자'를 선언하시고 불량품이 있으면 생산라인 가동을 전면 중단하는 등 품질관리에 집중하라고 지시했다"며 "품질은 직원들의 인격이자 고객존중의 표현이며 세계 일류기업으로 가는 원동력이라고 말씀했다"고 언급했다.

그는 "이건희 회장은 더 나은 미래국가 건설을 위해 애쓰며 나라를 사랑했던 애국경영인이었다"며 "국가가 잘 되려면 국민, 정부, 기업이 하나가 돼 한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이른바 '삼위일체론'을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허 회장은 끝으로 "이건희 회장의 그 큰 뜻을 소중히 이어받아 일등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추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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