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이현정 기자 = 정부가 각 법률에 흩어져있던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상법으로 모아 전 분야에 적용하기로 하면서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 손해보다 최대 5배 많은 한도에서 배상책임을 물려 기업들의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무거운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게 정부와 여당의 생각이다.

하지만 기업들은 과도한 '옥죄기 법안'으로 막대한 소송 비용을 초래할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 최대 5배 손해배상…징벌적 손배 확대 영향은

법무부는 지난달 집단소송법 제정안과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담긴 상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 했다.

21대 국회 개원 직후 여당 의원들이 언론중재법 등을 개정해 이 제도를 도입하려 한 데 이어 이번에는 정부 입법으로 다시 도입을 추진하고 나선 것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기업의 위법 행위로 다중의 피해가 발생했을 때 실제 피해액의 최대 5배까지 손해배상 책임을 물리는 제도다.

2011년 하도급법이 도입된 후 독점규제, 제조물 책임법 등 약 20개 개별법에서 산별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기업이 불법행위를 통해 이익을 얻을 경우 그보다 훨씬 큰 금액을 배상하도록 하는 건데, 분야별 도입 여부에 따라 형평성 문제 등이 생긴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정부가 이 제도를 상위법인 상법에 명문화한다면 기업이 이윤을 얻기 위해 하는 영업활동 과정에서의 위법행위를 아예 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게 된다.

사실상 모든 영업행위에서의 가해행위를 규제하겠다는 의도다.

법무부는 가습기 살균제·디젤차 배출가스 조작·사모펀드 부실판매, 가짜뉴스 등을 징벌적 손해배상이 가능한 사례로 제시했다.

2014년 카드사에서 약 1억건의 고객정보가 유출된 사태에 대입해 보면 당시 대법원은 카드사들의 책임을 인정하고 원고들에게 각 10만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배상도 소송을 제기만 약 1만명만 받을 수 있어 카드사들의 배상액은 10억여원에 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도입됐다면 배상액은 최대 50만원까지 가능하고 소를 제기하지 않은 피해고객에게도 카드사가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 배상액이 수천억 원에 이르게 된다.

폭스바겐 배출가스 조작사건도 주요 사례로 언급된다.

미국에서는 동일 사안에 최대 1천100만원을 보상했지만, 한국 고객에게는 1인당 100만원짜리 쿠폰만 제공했다.

폭스바겐의 이러한 대응은 우리나라에 집단소송제나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미비하기 때문이라는 게 법무부의 분석이다.

정부는 기업이 반사회적 위법행위를 할 동기를 차단해야 한다는 취지다.

◇재계 "소송비용 최대 10조 폭증…정상 경영 어렵다"

재계는 반기업 법안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지난 7일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경총 회장단 회의에서 "징벌적 배상제는 소송 남발과 기획소송제기로 기업 이미지의 심각한 훼손과 회복하기 어려운 수준의 경영손실 가능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면서 국회에 논의를 보류해달라고 촉구한 바 있다.

손 회장은 "블랙컨슈머와 법률 브로커에 의한 소송 남발, 기획소송제기로 회복하기 어려운 경영손실이 발생할 것"이라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위기 극복에 전력을 다 해야 하는 지금은 기업의 부담을 덜어줘야 할 때"라고 말했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도 지난 14일 민주당 공정경제 태스크포스(TF)와의 간담회에서 "일부 기업들의 문제에 대해 꼭 법으로 규제를 할 필요가 있는지 고려해 달라"면서 "법 개정과 관련해 보완해야 할 부작용과 대안을 놓고 대화하고 토론해 옳은 길 찾자"고 건의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지난 12일 정부 입법안이 통과되면 소송비용이 최대 10조 원(30대 그룹 기준)에 이를 것이라며 반대의견서를 제출했다.

이는 현행 소송비용 추정액인 1조6천500억원보다 6배 증가한 것이다.

전경련은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도입되면 무엇보다 소송 대응 여력이 없는 중소, 중견 기업들의 피해가 막대할 것"이라며 "신규 일자리 창출과 미래 먹거리 산업 투자에 쓰일 돈이 소송 방어 비용에 낭비돼 정상적인 경영활동이 어려워진다"고 주장했다.

경총이 22일 개최한 '집단소송제·징벌적 손해배상제 확대 도입 바람직한가' 토론회에 참석한 전문가들도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소비자를 구제하겠다는 취지와 달리 기업과 국가 경쟁력에 악영향을 미쳐 보완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美·英도 시행 중…"국내 사정에 맞게 절충해야"

집단소송제는 해외에서 일반적으로 도입돼 있다.

특히 미국과 영국은 이를 더 확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해서 시행하고 있다.

영국은 1763년 6시간 동안 용의자를 불법 감금한 집행관에게 용의자의 신체 피해액인 20파운드와 함께 1천280파운드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물린 게 첫 사례다.

미국은 전체 손해배상청구 소송 중 약 10%가 징벌적 손해배상 형식으로 청구되고 있다.

1994년 맥도날드에서 커피를 쏟아 화상을 입은 할머니가 치료비 16만달러(약 1억8천만원) 외에 286만달러(약 32억2천220만원)를 징벌적 배상으로 받은 소송은 유명한 사례다.

다만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제도 정비도 진행되고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을 도입한 알래스카 등 일부 주(州)의 경우 주법을 통해 배상액의 상한을 설정하는 방식으로 과도한 배상을 차단했고, 영국은 일정한 손해배상 구간을 설정해 배상액을 산정하도록 제한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사회적 편익보다는 부작용이 더 크다고 보고 도입을 보류하고 있다.

EU 내부에서는 유럽의 법문화에 맞는 집단소송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유정주 전경련 기업제도팀장은 "집단 소송이나 징벌적 손해배상은 영국이나 미국처럼 민사 구제를 원칙으로 하는 국가에 맞는 것이지 우리 법체계와는 맞지 않는다"면서 "기존 형벌, 과징금, 과태료 제도와 중복돼 과잉처벌을 받을 수 있어 도입하더라도 현재의 형사처벌과 행정처분 등의 제도를 정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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