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먼저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구호였다. 그 때문은 아니지만, 코로나19 위기의 충격도 과연 사람에게 먼저 닥쳤다. 그리고 이제는 무생물인 한국은행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은행의 존재 이유에 고용안정을 추가하려고 한다. 한국은행법을 그렇게 고치면 고용사정이 좋아질까?

미국 중앙은행 즉, 연준은 물가안정과 고용안정의 이중목표(dual mandates)를 추구한다고 알려져 있다. 스태그플레이션이 극심하던 1977년 미 연준법에 고용안정 목표가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입법 의도와 반대다.

미 의회는 연준에게 스태그플레이션 퇴치를 위해 물가안정과 고용안정 동시 해결(both A and B)을 기대했다. 그러나 연준은 그 기대를 저버리고, 유례 없는 고금리 정책을 통해 고용을 희생했다. 법률상의 이중목표를 물가안정과 고용안정의 취사선택(either A or B) 문제로 접근하고 그중 더 시급한 물가안정에 매진한 것이다.

당시 폴 볼커 의장의 통화정책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다. 두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상식이기 때문이다. 한은법에 고용안정을 담더라도 마찬가지다. 법률 개정만으로 고용사정이 개선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2011년 한은법에 금융안정을 추가할 때는 물가안정보다 후순위에 두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일본은행법(제2조)은 '물가안정의 도모를 통해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을 그 이념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현행 한국은행법 제1조와 마찬가지로 고용안정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2013년 이후 일본은행은 고용안정을 위해서 어떤 중앙은행보다도 열심히 돈을 푼다.

결국 고용안정을 위한 통화정책은 법률에서 나오지 않는다. 정책결정자들의 철학, 위기의식(책임감) 그리고 조직문화에서 나온다. 사정이 정말 급하면 한국은행이 지금이라도 고용확대를 위해 얼마든지 돈을 풀 수 있다. 영란은행과 유럽중앙은행(ECB)은 인류의 미래가 달린 친환경·저탄소 경제로의 이행에 정책의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법률 개정은 고려하지 않는다. 정책변화는 법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나라 국회가 한은법을 개정하려면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정책의 목표를 넓히려면 수단도 함께 확대해야 한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우 1946년 고용법(Employment Act), 1977년 연준법, 그리고 1978년 완전고용 및 균형성장법(Full Employment and Balanced Growth Act)을 통해서 고용안정을 강조하는 법률들을 숱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의회가 법정 최고실업률(3%)을 선언하는 등 정치쇼를 하면서도 수단은 전혀 강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은 달랐다. 영국은 1998년 영란은행에서 금융감독기능을 폐지하고 통화정책에만 집중토록 했다. 그런데 10년 뒤 노던록은행의 파산과 유례 없는 실업난이 찾아왔다. 그래서 2012년 영란은행에게 금융안정과 고용안정의 책무를 추가하면서 금융감독기능을 다시 부여했다.

한국은 어느 쪽인가?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동결했는데도 지금 대출금리가 오르고 있다. 금융감독당국이 부동산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신용대출을 옥죄고 대출자격을 좁힌 결과다. 금융감독당국이 부동산 시장을 빌미로 통화정책의 영역까지 스스럼없이 넘나드는 마당에 한국은행이 무슨 수로 고용안정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겠는가?

국회는 이런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한국은행에게 고용안정의 책무를 부여하려면 수단도 함께 강구해야 한다. 수단을 외면한 채 제1조만 개정하는 것은 공염불이다. 염불이나 기도는 국회가 아닌 종교모임에서 할 일이다.

현재 마련된 한은법 개정안 중에는 한국은행을 우회적으로 압박하는 내용도 있다. 즉 '정부정책과의 조화' 규정(제4조)을 고쳐서 정부의 고용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토록 촉구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부작용이 훨씬 크므로 기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부정책과의 조화' 규정은 영국, 독일, 유로지역, 일본 등의 중앙은행법에도 있다. 그런데 그 규정의 뿌리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 제정된 구소련의 중앙은행법(Gosbank Act)에 있다. 1939년 히틀러와 1942년 도조 히데키가 침략전쟁을 위해 그 규정을 모방하면서 일부 다른 나라까지 퍼졌다.

반면 미국, 스웨덴, 사우디아라비아, 싱가포르, 홍콩처럼 중앙은행이 명실상부한 정부조직인 경우에는 중앙은행법에 '정부정책과의 조화' 규정이 빠져있다. 정부기관이 다른 정부기관에 협조하라는 규정은 있을 필요가 없다. 결국 '정부정책과의 조화' 의무는 중앙은행이 민간기관이었던 시절 전체주의 국가들이 민간은행을 정치도구로 만들려던 흔적이다. 관치금융과 관존민비(官尊民卑)의 화석인 것이다.

한국은행은 민(民)도 아니다. 지배구조나 재무구조상 넓은 의미의 정부에 속한다. 그러므로 '정부정책과의 조화' 규정을 더 고칠 필요는 없다. 만일 한국은행을 더 옥죈다면, 그것은 중앙은행 제도의 후퇴다. 참고로 독일에서는 "분데스방크는 연방정부의 지시를 받지 아니한다(분데스방크법 제12조)"는 점을 특별히 강조한다. 히틀러의 관치금융에서 얻은 뼈저린 교훈이다. 그렇다고 분데스방크가 정부정책을 유난히 거스르는 것도 아니다.

한국은행이 명심할 것도 있다. 고용안정을 위해 할 수 있는 역량을 보여주든가,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든가, 고용안정을 위한 정책수단이 부족하므로 보완해달라고 국회를 설득하는 솔직함과 적극성이 필요하다. 그냥 우물우물하면서 눈치만 살피다가는 오해와 추궁만 커질 것이다.

따지고 보면 한은법 개정 논의가 갑자기 시작된 것은 아니다. 금년 초 코로나19 위기가 터졌을 때 이미 나왔다. 그때는 저신용등급 회사채나 CP를 매입하는 데 한국은행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불만 때문에 여당이 한은법 개정 의사를 밝혔다.

법률은 고쳐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국은행은 자극을 받아 저등급 회사채와 CP를 매입하는 데 협조했다. 결국 법이 아닌, 의지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때처럼 한국은행이 고용에 좀 더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 정치권의 숨은 의도라고 보인다. 이것이 지금 국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태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법률 개정의 향방을 기다리기 전에 발 빠르게 움직이면서 구체적 행동을 보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법안이 제출되면 관련 논의에 적극 참여해 중앙은행의 과감한 변화를 치열하게 고민하겠다"는 답변은 공허하다. 이른바 유체이탈 화법이요, '강 건너 불 보듯 한' 태도라고 비판받기 십상이다. 자신의 존재이유와 과감한 변화에 대한 치열한 고민은 한은 안에서 진작부터 진행되고 있어야 했다.

미 연준의 경우 법률상 연준이 할 수 있는 모든 정책대응 목록이 연준 내부에서 미리 작성되었다가 2008년 9월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작된 바로 다음 날부터 작동했다(The Scope of Monetary Policy Actions Authorized under the Federal Reserve Act, 2004년 7월). 이번 코로나19 위기에도 그랬다.

결론적으로 고용안정을 위한 한국은행법 개정은 필요 없다. 정책전환의 관건은 법률이 아니라 정책당국의 철학과 조직문화다. 그래서 국회와 한국은행, 심지어 인사권자인 대통령도 이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사람이 먼저다."

◇ 덧붙이는 글: 일본은행이 유난스럽게 고용안정에 민감한 이유는 1990년대의 쓰라린 정책실패 때문이다. 1990년부터 일본 경제는 자산가격이 붕괴와 더불어 고용과 성장이 곤두박질치는 헤이세이(平成) 불황이 시작되었다. 그때 일본은행은 정책전환에 아주 소극적이었다. 골수 일본은행맨인 총재가 물가안정만 강조했고, 순혈주의 문화에 젖은 일본은행에서는 총재와 다른 의견을 갖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지부동의 일본은행을 향해 급기야 여당이 화를 냈다. 일본 정계의 최고실력자인 가네마루 신(金丸 信) 자민당 부총재가 1992년 3월 27일 "일본은행 총재의 목을 쳐서라도 금리를 낮춰야 한다"며 공개적으로 압박했다.

미에노 야스시(三重 野康) 총재는 그런 엄포에 흔들리지 않았다. 의연하게 긴축정책을 고수했다. 덕분에 '헤이세이 시대의 검객(平成の鬼平)'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부당한' 압력에 맞서는 미에노 총재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요즈음 윤석열 검찰총장의 인기와 비슷했다. 학창시절 씨름(쓰모) 선수였던 미에노 총재는 체격과 주량 면에서도 윤석열 총장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여론이 뒤집혔다. '잃어버린 20년'의 초반에 좀 더 과감해야 했었고, 가네마루 신이 옳았다는 것이 일본 국내외에서 중론이 되었다. 반면 한때 국민적 영웅이었던 미에노 총재는 어리석었던 사람으로 쪼그라들었다. 일본은행도 전 세계적인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벤 버냉키 연준의장의 경우 일본은행을 비판함으로써 더욱 유명해졌다.)

일본은행은 버블붕괴 후 10년 지나서야 양적완화, 신용완화, 마이너스금리 정책까지 허둥지둥 실험하기 시작했다. 2012년 4월 미에노 총재는 병상에서 그런 상황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그때 가족에게 "주변에 알리지도 말고 조촐하게 장례를 치르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그의 사망은 장례가 끝난 뒤 알려졌다.) 자괴감의 표현이었다.

일본은행의 정책전환은 인적 쇄신을 통해 추진되었다. 관료 출신의 구로다 하루히코(?田 東彦) 총재와 함께 이와타 키쿠오(岩田 規久男) 교수가 일본은행 부총재로 투입되었다. 이와타 교수는 헤이세이 불황이 시작될 때부터 일본은행의 구태의연함을 신랄하게 비판하던 사람이었다.

껄끄러운 사람들을 수뇌부로 맞이한 일본은행 직원들은 참담하고, 난감했다. 그런 사태를 감지하고 일찌감치 일본은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긴축 통화정책을 정교한 이론(日銀이론)으로 뒷받침하던 오키나 쿠니오(翁 邦雄) 일본은행금융연구소 소장이었다. 한때 미에노 총재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왕당파'요 후배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양적완화 논의가 시작되면서 '적폐세력'으로 전락했다.

인심은 바뀐다. 경제이론도 바뀐다. 그러므로 중앙은행은 외부의 목소리에 귀를 열고, 끊임없이 고민하며, 부지런히 변신해야 한다. 필자가 일본은행의 여러 간부에게 직접 들은 한탄이다. (차현진 한국은행 연구조정역)

※'노미스마(nomisma)'는 그리스어로 화폐와 명령(법)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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