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기업의 본질은 성장 추구다. 성장은 기본적으로 영토 확장을 전제로 한다. 기업들은 인력과 자금을 쏟아부어 생산체제를 갖추고 이를 통해 이윤을 창출해 왔다. 그 과정에서 문어발식으로 회사를 늘리면서 규모를 키워 성장해 온 게 우리 기업들이다. 현재 대한민국 산업구조의 밑바탕을 일구는 데 이러한 기업들의 성장사는 유효했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바꿔놓은 세상은 기업들에 생존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던진다. 여기서 딜레마가 생긴다. 살아남는데 전력할 것인가, 아니면 더 성장해 살아남을 것인가.

'코로나 시대'의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를 꼽으라면 기업 간 동맹체제의 확대다. 기업들이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다는 뉴스는 끊임없이 계속된다. 사실 이전과 비교하면 생경한 모습들이다. 같은 업종 내 기업들이 아닌 전혀 조합이 맞춰지지 않을 것 같은 기업들도 손을 잡는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더 성장하기 위해서. 모험과 기회를 동시에 잡으려는 시도들이다.

대규모 자금이 필요했던 과거의 합종연횡과는 달리 최근 기업 간 동맹체제는 '저비용 고효율'을 추구한다. 재무적 부담을 최소화하고, 사업적 시너지는 최대화하려는 전략이다. 금고 속에 고이고이 모셔뒀던 내 지분도 기꺼이 상대에게 넘겨주고, 상대의 지분도 의심 없이 받는다. 뭉쳐서 서로의 생존을 담보해 주고, 돈을 더 벌 수 있는 토대가 된다면 적과 동지의 개념은 사라진다. 그 중심에는 디지털이라는 전략이 자리하고 있다. 콧대 높던 대기업들이 과거엔 쳐다보지도 않던 IT 기업들에 먼저 손을 내미는 현상이 이를 방증한다. 더는 자존심은 없다. 살아남기 위해선.

'뭉쳐야 산다'를 실천하는 대표적인 사례는 유통과 물류, 콘텐츠 시장에서 나타나고 있다. 국내 최대 포털업체 네이버는 이러한 합종연횡의 중심 기업이 됐다. 포털업체를 넘어서 쇼핑과 콘텐츠 등을 아우르는 막강한 플랫폼 인프라를 통해 기성 기업들을 흡수하는 블랙홀이 됐다. 직접 물건을 사들여 창고에 쟁여두고 주문이 들어오면 선별해 포장해 배송하는 시스템이 네이버에는 없다. 하지만 네이버는 한국 쇼핑 시장에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됐다. 그 모든 과정을 대규모 자금을 들여 스스로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물건을 팔려는 중소 상공인부터 대기업까지 자신의 플랫폼으로 끌어들인다. 배송은 CJ대한통운에 맡긴다. 네이버와 CJ대한통운이 서로의 피를 섞으면서 뭉친 이유다. CJ가 가진 막강한 문화 콘텐츠도 네이버를 통해 유통한다. 서로가 가진 하나를 내놓고 합쳐 둘 이상으로 만들려는 시도다.

국내 최대 통신사인 SK텔레콤은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업체인 아마존과 손을 잡는다. 자회사인 11번가를 키우기 위한 전략적 파트너로 아마존을 끌어들인 것이다. 아마존은 11번가에 최대 3천억원의 투자를 진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아마존의 한국 진출에 문을 열어준 것으로 유통·IT 업계에서는 벌써 긴장하고 있다. 사업 확대에 따라 대규모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이다. KT는 GS리테일과 손을 잡았다. 국내 유통 대기업 가운데 가장 많은 유통점포망을 가진 GS리테일과 데이터와 인공지능(AI) 등의 막강한 IT 인프라를 가진 KT가 뭉쳐 유통과 물류 혁신을 꾀해 보겠다는 의도다. 통신사는 이미 우리가 알던 통신사가 아니다. 네이버와 SK텔레콤, KT의 사업 경계는 점점 허물어져 가고 있다.

시장의 변화 속도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 빠르고 무섭다. 그 변화 속에서 주류 기업이라는 개념은 사라져 간다. 재계 순위 몇 위라는 허상도 디지털이라는 도구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내가 가진 무언가를 내놓고 상대와 협치를 하지 않으면 생존과 성장은 담보할 수 없는 세상이 돼 가고 있다. 산업구조의 변화는 이러한 시장의 자발적 동태 속에서 스멀스멀 나타나고 있다. 어느 순간 세상은 바뀌어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디지털에 올라타지 않으면 도태될 수 있다는 것은 일시적 공포가 아닌 현실이 될 수 있다. 은행을 찾기 전에 서로의 부족함을 메워줄 파트너를 찾는 게 생존력을 더 높여주는 시대가 될 것이다. 기업들이여 살아남아 계속 돈을 벌고 싶다면 자존심을 버려라. (기업금융부장 고유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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