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총리도 눈물을 보였다. 영세자영업자들의 고충이 안타까워서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고통은 사회의 저 아래쪽에 있는 사람부터 서서히 목줄을 조인다. 그 추운 날 헬스장, 필라테스 사업장 업주들이 들고나온 "살고자 나왔습니다. 살려주십시오"라고 쓴 피켓은 추운 날씨만큼이나 마음을 후볐다.

지금 세계 각국의 보건당국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죽음 즉, 죽을 때 몸 안에 바이러스가 있는지(death with COVID)에 사활을 건다. 하지만 그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후유증도 심각하다. 외국의 완치자 사이에서는 "차라리 아플 때가 좋았다(The cure is worse than disease)"는 아우성이 들린다. 후유증은 아직 연구된 것이 없다.

더 애매한 문제가 있다. 감염되지도 않았는데, 죽음이 드리워지는 경우다. 장사가 안돼서 화병에 걸리거나 무력감에 빠지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바이러스로 인한 간접 죽음(death by COVID)이다.

미국의 절망사가 대표적이다. '절망사(death of despair)'란 빈부격차의 확대 속에서 삶에 지친 빈곤층이 마약과 알콜중독으로 죽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오랜 기간 누적된 심적 고통에서 비롯되므로 코로나19와 바로 연결 짓기는 어렵다. 절망사라는 말을 처음 만든 앵거스 디턴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조차 그렇게 믿었다.

그의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지난해 3월 국가비상사태 선포 직후부터 10월까지 9개월 동안에만 미국의 절망사가 예년보다 3만 명이나 늘었다. 증가율로는 45%나 된다. 대부분은 고령층이 아니라 15~54세에 해당하는 경제활동인구이고, 그들의 과다 약물 투여가 원인이다. 고독과 무력감의 반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절망사를 파악할 만한 통계가 없다. 그렇다고 절망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뿐이다. 택배기사의 과로사가 그 첫째다. 노동조건에 대한 택배기사들의 교섭권이 좀 더 많았다면, 과로사까지 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을 고용한 인터넷 플랫폼들은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는 점과 대비하면, 생계에 쫓긴 택배기사의 과로사는 분명 한국형 절망사다.

지난해 우리나라 인구가 2만명 감소한 것도 한국형 절망사의 한 유형이다. 삶이 팍팍해져 혼인과 출산을 미루는 바람에 태어나야 할 생명이 피어나지 못하여 인구감소가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의 절망사가 아닐 수 없다. '세상은 이렇게 끝나지/요란하지 않게, 조금씩 콜록이며(This is the way the world ends, Not with a bang but with a whimper)'라는 T. S. 엘리엇의 시를 떠올리게 된다.

영세자영업자들의 생활고가 그 세 번째쯤 될 것이다. 그들은 지금 조금씩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 구제역이나 조류독감 등 동물들의 전염병이 터졌을 때 검역당국이 내리는 명령을 살처분이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stamping out'다. 인정사정 보지 않고 도장을 쾅쾅 찍어 사형선고를 내리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거리두기를 강조하며 정부가 인정사정 보지 않고 영업제한 명령을 꽝꽝 쏟아내는 것도 명백한 'stamping out'이 아닌가!

그렇다. 정부의 행정명령은 영세자영업자들에 대한 살처분이다. 구제역이나 조류인플루엔자 때 살처분의 피해를 본 농민들에게 정부가 소득을 보전했다면, 코로나19 위기에도 그래야 한다. 최근 여당과 대통령이 '이익공유제'라는 이름을 들고나왔지만, '민간의 자발적 참여'라는 애매한 단서가 붙어서 오히려 논란이 커졌다. 정부가 살처분 또는 영업방해의 당사자로서 전면에 나서 실타래를 푸는 것이 정답이다.

"자신들이 좋아서 시작한 장사의 손실을 왜 월급쟁이의 세금으로 메꾸냐"는 비판은 부당하다. 외적이 침범하여 접경지역을 점령했을 때 "자신들이 좋아서 살다가 뺏긴 땅을 왜 타지역 국민들이 총을 메고 지키냐"고 묻는 것과 똑같다. 접경지역이나 자영업이나 위험에 가장 취약할 뿐, 그 위험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저 아래 영세자영업자부터 올라오는 절망사의 냄새를 방치하는 국가는 무능하고 비겁한 국가다. 그것이 미국, 독일, 일본 정부가 자영업자의 손실을 보상하는 도덕적 이유다. 경제적 이유를 앞선다.

헬스장, 필라테스 사업장 업주들이 "살려주십시오"라고 쓴 피켓을 들고 아우성치던 날, 코스피지수는 대망의 3,000선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요즘 주식뿐 아니라 부동산 투자자들도 신이 났다. 세상이 부조리하기가 한국전쟁 때와 별로 다르지 않다. 한국전쟁 때 부산 영도다리 옆에서는 허기에 지친 전쟁고아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나 그 바로 옆 국제시장에서는 영화 속 '꽃분이네' 가게의 덕수와 영자처럼 깡통장사들이 밥 먹을 틈도 없이 신나게 물건을 팔았다. 세상이 정글 속 같았다.

그때 정부는 무력했고, 각자도생만이 살길이었다. 지금 정부가 그때처럼 무력해서야 되겠는가. 총리의 눈물이 끝이어서는 안 된다. (차현진 한국은행 연구조정역)

※'노미스마(nomisma)'는 그리스어로 화폐와 명령(법)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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