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지난 16일 오전, 한국투자증권이 한 시간 뒤 열릴 정일문 사장의 기자회견 소식을 급박하게 알려왔다. 예상은 가능했다. 일주일 뒤 환매가 중단된 팝펀딩 펀드 관련 제재심의위원회를 앞둔 상황에서 '긴급'을 붙여 발표할 내용은 해당 펀드에 대한 선 보상밖엔 없었다.

하지만 한국투자증권은 한 발짝, 아니 몇 발짝 더 나아갔다. 팝펀딩뿐만 아닌 10개 펀드, 총 1천584억 원 규모의 부실 펀드 투자자에게 원금 100%를 선 보상하겠다고 했다. 한국투자증권의 표현대로 '전향적인' 결정이었다.

보상할 펀드에는 라임과 옵티머스, 젠투 등 사모펀드 사태를 주도한 굵직한 펀드들이 포함됐다. 한국투자증권이 판매한 개별 펀드의 규모는 각각 200억 원 안팎에 불과하다. 이 펀드들을 수천억 원 단위로 판 판매사들은 예기치 못한 '선빵'을 당한 셈이다.

한국투자증권의 이번 행보를 두고 업계에선 볼멘소리도 나온다. 자투리 펀드에 불과한 펀드에 선제 보상 프레임을 씌워 고객 신뢰 회복이란 이미지를 독식했다는 푸념이다. 한국투자증권으로선 꽤 전략적인 선택이었지만, 다른 증권사들의 부담은 그만큼 커졌다.

일정 부분 이해는 된다. 사적 화해라는 개념을 도입해 손실이 확정되지 않은 금융상품마저 선 보상을 유도하는 금융당국의 보이지 않는 입김을 생각하면 판매사의 선택지는 다양하지 않다.

특히 금융당국의 제재를 앞둔 판매사라면, 자칫 지배구조까지 영향을 주는 최고경영자(CEO)가 제재 대상에 포함됐다면 금융회사는 적극적인 보상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한국투자증권은 이번 행보가 다음 주 예정된 제재심과는 무관하다고 했다. 이날 정 사장은 제재심을 고려한 면피성 결정이냐는 질문에 '오직 고객만 생각한 올바른 결정'이라고 답했다.

사실 팝펀딩 제재심을 의식했다면 한국투자증권이 이처럼 전향적인 결정을 할 유인은 떨어진다. 금감원은 한국투자증권에 기관경고를 사전 통보했지만, 정 사장을 포함한 관련 임원은 제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금융당국의 제재 양정 기준을 고려하면 기관경고가 기관주의로 낮아질 가능성도 작다.

펀드와 같은 금융투자상품을 보상하기 위해선 꽤 오랜 준비가 필요하다. 보상을 위한 논리를 세워 이사회를 설득해야 해서다. 전달 과정이 긴급했을 뿐 한국투자증권의 고민은 꽤 길었을 법하다.

하지만 혁신이라 표현한 이번 결정이 앞으로의 한국투자증권, 더 나아가 금융투자업계에 모범이 될지는 따져볼 일이다.

한국투자증권이 보상하기로 한 1천584억 원은 지난해 당기순이익(7천83억 원)의 22%, 올해 1분기(3천500억 원)의 45%에 달하는 큰 규모다.

정 사장조차 '부담스러운 규모'라고 표현한 보상을 결정할 수 있었던 건 현재의 호실적 덕이다.

한국투자증권은 미래에셋증권과 당기순이익 기준 업계 1위를 다투는 업계 톱티어다. 지난해 동학개미 열풍에 힘입어 증권사들은 그야말로 실적 잔치를 벌였다.

혹자는 올해가 대한민국 증권업 역사가 시작된 30년 이래 최대 성수기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내년까지, 최소한 올해까지는 증권사가 돈 못 벌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그 덕에 예기치 못한 사고에도 보상은 판매사가 선택할 수 있는 꽤 쉬운 선택지가 됐다.

하지만 시장에는 사이클이 있고 부침은 반복되기 마련이다. 가상자산까지 등장하며 변동성과 불확실성이 종잡을 수 없이 커지는 국내외 금융 환경을 생각하면, 언제까지나 호실적이 뒷받침되리란 보장은 없다.

공교롭게도 이날 미래에셋그룹은 한국투자증권의 기자간담회가 끝난 직후 고객 동맹 실천 선언문을 발표했다. 최현만 수석부회장을 필두로 그룹사 CEO가 모두 참석한, 꽤 오래 준비하고 미리 공지한 행사였다.

이날 최 수석부회장은 미래에셋의 행사 한 시간 전 긴급 간담회를 열어 고객 신뢰를 강조한 한국투자증권을 향해 '오해하지 않는다. 동료 업계 회사를 비난할 생각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다만 이날 미래에셋이 한 고객동맹 선언은 고객을 위한 차원이 다른 선택이었음을 강조했다.

투자자 책임 원칙에 기반해 성장해야 하는 자본시장에서 보상은 언제나 선(善)이 될 수 있을까. 늘어난 거래대금에 힘입어 돈방석에 앉게 된 증권사의 보상 정책을 마냥 칭찬만 해야 할까. 언젠가부터 당연시 여겨진 보상 만능주의가 드리운 그림자가 너무 짙다. (투자금융부 정지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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