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세진 산업은행 부장



<편집자주: 유리천장. 일을 잘하고 똑똑해도 사회에서 여성이 높은 지위에 오르기까지 뚫어야 하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일컫는 말이다. 금융시장에 종사하는 여성들도 유리천장을 피할 수는 없었다. 금융시장도 4대 은행에 여성임원이 없을 만큼 두껍기로 소문난 유리천장이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유리천장을 깨고 상위 1%로 우뚝 선여성 금융인들을 만나봤다. 신입사원 시절 조그만 실수에도 주눅이 들고 남몰래 울기도 했던 여직원이 실력파 임원이 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을까. 유리천장 아래서 연약한 꽃으로 남기보다 이를 뚫고 큰 나무가 되는 쪽을 택한 베테랑 여성 금융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서울=연합인포맥스) 정선영 기자 = "앉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하고..책상 밑에 사표를 딱 써놓고는 언제 낼까 그 생각만 했지 뭐"

선생님보다 은행원을 하는 편이 나을 줄 알았다. 영문과를 나와 임용고시를 합격하고 광주에서 선생님이 돼야지 생각하던 참이었다.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산업은행 중견행원`공고를 보지 않았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당시만 해도 선생 월급이 14만원, 은행원은 겨우 9만원이 조금 넘었다.

그렇게 선택한 은행원 생활은 숨어서 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심술궂은 상사 때문에, 내 마음대로 안되는 일 때문에, 주는 것 없이 미워하는 여직원들 때문에 왜 은행에 들어왔을까 후회하기도 했다. 결국 실력을 쌓는 게 최고라고 생각했다.

연극을 좋아하고 잘 울던 23살 신입행원이던 그가 산업은행의 지점장을 두루 맡으며 은행원으로서 자리를 잡았던 시간을 되짚어 본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36년간의 은행 생활. 김세진 산업은행 부장이 조곤조곤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대졸 여직원이 싫다고? = 1975년부터 은행권의 대졸 여성 공채가 이뤄지면서 `중견 행원`이라는 자리가 생겼다. 고졸 행원들 사이에서 이른바 `대학물` 먹은 공채 여직원은 시작부터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 주는 것 없이 얄미운 기수였던 셈이다.

첫 부서인 기획부에서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났던 첫날이었다. 책임자였던 대리의 눈을 치켜뜨며 "왜 왔냐"고 물었다. 발령이 나서 왔다고 하자 "원한 게 아니고?"라고 반문했다.

그 대리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점심 먹고 조금만 늦어도 욕설이 날아들었고 서류을 던지는 것은 예사였다.

매일같이 구박을 받던 김세진 부장은 신경성위염에 피부 질환이 겹쳤다. 둘째를 임신중이던 김 부장은 신데렐라가 따로 없는 생활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후임이 들어와도 신입이 하는 일을 시키는 상사에게 하루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물었다. "왜 저만 미워하세요"

답변은 "개인적인 감정 없다. 중견 행원인 여직원이 내 밑에 있는게 싫다"였다.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하자 남편이 말했다. 영원히 같이 있을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이 발령날 수도 있는데 사람 때문에 그만두면 억울하지 않으냐고.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다음날 김 부장은 책상 밑에 곱게 모셔놨던 사표 세장을 찢었다. 그리고 5개월 후 그 상사는 발령이 났다.

▲완벽주의자 상사 = 두번째 상사도 만만치 않았다. 홍보실 근무할 때 사보 담당을 했는데 완벽주의자인 상사는 한치의 빈틈이 없었다.

오타는 물론 1분 지각도 절대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특히 사보를 3차 교정한 후 보고할 때 김 부장의 심장은 두근두근했다. "야 김세진이. 니 내 물먹일라 그러재"라며 사보가 날아올랐다.

신경성 위염은 또 왔다. 전전긍긍하다보니 재발한 것이다. 그러나 상사는 위내시경을 받고 오겠다는 말에도 무심히 답했다.

"언제 죽는다더나"라며 가시박힌 말을 하는 상사 때문에 가슴이 쿵 내려앉기 일쑤였다.

그 상사는 나중에 IMF외환위기 때 해고를 당했다. 혹독한 상사들을 겪으며 은행 생활을 했던 김세진 부장은 오히려 마음을 다부지게 먹게 됐다. 지금 돌이켜보면 최악의 상사도 도움이 된 셈이다. 당시를 돌아보면 사표를 찢고 마음을 잡았던 순간이야말로 은행 생활의 큰 자산이 됐다.

▲인사고과, 실력으로 진검승부 = "그 사람은 가장이잖아" "너는 군대 경력이 없으니까" "나이가 어리잖아"

인사고과에서 고배를 마시는 이유는 참 다양했다. 후임 남자직원에게 승진 기회가 돌아가는 일도 허다했다.

가장이라서 승진을 먼저 시켜야 한다는 이유에 처음에는 항의했다. "그 사람 아내는 학교 선생님이잖아요"라며. 그럴수록 시끄러운 애, 자기주장 강한 애로 낙인찍힐 뿐이었다.

"상을 받아도 결국 여자 치고는 일 잘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실력으로 승부하려면 진짜진짜 일을 잘할 수 밖에 없어요"라며 김 부장은 말했다.

올해의 산은인상, 혁신 아이디어상 등을 수상했는데도 매일 고과가 뒷전으로 밀려나자 김 부장은 인사 담당 이사를 찾아갔다.

IMF 때 권고 사직, 건강 등으로 동기들이 다 떠나고 김 부장은 혼자 남았다. 그는 "이젠 이익도, 손해도 나 혼자 보니까 오히려 용기가 생겼다"고 말했다.

그동안의 업무 능력과 성과 등을 놓고 인사 담당 임원과 대화를 하고 김 부장은 강남지점을 거쳐 잠실 지점장 자리에 올랐다.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던 산업은행으로서는 4급 지점장 발탁은 파격 인사였다.

김 부장은 잠실지점장으로서 일하는 동안 "앉아서 장사하는 곳"이라는 산업은행의 스타일을 고수하지 않았다.

그는 지점 근처의 기관들을 찾아다니며 수신 유치에 나섰다. 아파트마다 전단지를 붙이기도 했다.

국책은행이라 안정적이고 금리가 나쁘지 않음에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만큼 산업은행 알리기에 힘을 쏟았다. 창구에서의 고객 상담도 친절에 초점을 맞췄다. 발로뛴 끝에 수신고 1등, 고객 만족 1등이라는 성적을 일궈낼 수 있었다.

▲네 마음을 지켜라 = 김 부장은 직장 생활에서 위기가 올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라고 말한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켜라.

"마음이 무너지면 다 무너져요. 위기가 올 때도 있고 다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도 많겠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마음을 지키는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그리고 인적 네트워크를 중시하라고 그는 덧붙였다. 혼자 갖고 있으면 병이 될 일도 함께 나누고 털어놓으면 이겨낼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는 말이다.

김 부장은 "섬세한 금융업무는 여성들에게 잘 맞지만 여성들은 네트워크 쌓는데 유난히 취약해요. 후배들에게 밥과 술도 많이 사주고 인맥을 넓혀서 마당발이 되는 것이 중요해요"라고 말했다.

"잉잉 울다가도 코 한번 휭 풀고 일어서는 거죠. 그건 마음이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김세진 부장은 활짝 웃는다. 씩씩한 직장인이 되는 법. 어렵지 않다.

김세진 부장은 지난 1977년 산업은행 공채로 입행한 후 종합기획부, 국제영업부, 여신부서를 거쳐 1999년 최초 여성지점장으로 부임한 바 있다. 현재 산업은행에서 파이낸셜 컨설턴트(FC)를 맡고 있다.

syjung@yna.co.kr

(끝)
저작권자 © 연합인포맥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