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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자 수출입은행 실장>



<편집자주: 유리천장. 일을 잘하고 똑똑해도 사회에서 여성이 높은 지위에 오르기까지 뚫어야 하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일컫는 말이다. 금융시장에 종사하는 여성들도 유리천장을 피할 수는 없었다. 금융시장도 4대 은행에 여성임원이 없을 만큼 두껍기로 소문난 유리천장이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유리천장을 깨고 상위 1%로 우뚝 선 여성 금융인들을 만나봤다. 신입사원 시절 조그만 실수에도 주눅이 들고 남몰래 울기도 했던 여직원이 실력파 임원이 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을까. 유리천장 아래서 연약한 꽃으로 남기보다 이를 뚫고 큰 나무가 되는 쪽을 택한 베테랑 여성 금융인들의이야기를 들어본다.>



(서울=연합인포맥스) 정선영 기자 = "홍일점으로 입사해서 그런지 부서장, 팀장 직급을 다는게 다 처음이었어요"

1987년 수출입은행에 입행할 때만 해도 여성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국제 업무가 유달리 많은 수출입은행의 특성 때문인지 여성이라고 차별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선배들 말로는 김 실장은 '안 끼는 데가 없는' 적극적인 성격의 홍일점이었다. 그런 성격 덕분에 지적도 많이 받았으나 업무 면에선 선박금융은 물론 프로젝트파이낸싱(PF), 플랜트 수출 지원 등 굵직굵직한 일들을 당차게 진행할 수 있었다.

올해부터 수출입은행 국제협력실장으로 자리를 옮긴 터라 사무실에 놓인 상큼한 난꽃이 눈길을 끈다. 김경자 실장의 수출입은행 이야기를 들어봤다.

▲법대출신이라 잘따진다고? = 김 실장은 질문이 많은 신입행원이었다. 은행 생활에서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은 꼭 물어봤다.

어느날 왜 임차보증금 지원할 때 남자와 여자는 다르게 적용되냐고 묻자 선배가 조용히 말했다. "조용히 좀 살아라"

김 실장은 "균형이 맞지 않는 부분을 물어봤죠. 복지혜택이란 넓게 봐서 급여인데 똑같은 조건인데 여자라서 지원을 못받으면 안되는거니까"

법학과 출신으로 법무실에서 첫 은행생활을 시작한 김 실장의 질문은 은행 입장에서는 따지는 것으로 비춰졌다.

누군가 김 실장에게 말했다. 왜 여자는 숙직을 안하냐고. 그래서 담당 부서에 가서 또 물어봤다. 김 실장은 "궁금하잖아. 왜 여자는 안하는지"라며 웃었다.

그러나 이런 질문들은 이내 "책상을 치면서 따졌다고 하더라"고 일파만파 퍼지기도 했다. 의미심장한 질문들이 은행내 불공평한 부분을 꼭꼭 집어낸 탓이다.

김 실장은 "합리적이지 않은 이유라면 관행이나 통념, 고정관념이라도 그게 진짜 맞는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봐요"라고 말했다. 그는 "진짜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심이 없고 덤덤한 말투가 오히려 당시 선배들에겐 더 따끔한 지적으로 보였을 법하다.

▲선박금융, 대형 수주에 `뿌듯` = 선박금융을 맡으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김 실장은 작년에 유럽선주사가 발주한 대형 컨테이너선 20척 계약을 수출입은행에서 먼저 접촉해서 따냈을 때라고 말했다.

"정말 초대형, 최첨단, 친환경 컨테이너선이었어요. 중국, 일본 등 다른 나라와의 경쟁이 붙기도 하는 대형 건이었죠"

김 실장은 초대형,최첨단, 친환경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대우조선해양이 지난해 수주한 컨테이너선 계약은 계약서에 사인하기까지 무려 10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규모가 크고 발주 내용도 이색적이서 금융 경쟁도 치열했다. 공적수출신용기구의 자금일 빌리고 싶어하는 선주사에 선제적 금융을 시행함으로써 우리나라로 계약을 가져온 선제적 금융 사례로 꼽힌다.

당시 수출입은행은 발주사의 재무상태와 신용도는 물론 배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예상 가능한 문제점, 배를 옮기기 위한 항로, 기술적 리스크 등을 낱낱이 검토했다고 한다.

김 실장은 "그런 큰 배가 있는 것도 처음 알았죠. 친환경 설계에 배 모양도 자체 개발해서 우리 조선업계로서는 굉장히 의미있는 일이었어요"라며 상기된 표정으로 설명했다. 국익에 기여했다는 뿌듯한 마음은 선박금융 업무를 하면서 덤으로 얻게되는 즐거움인 셈이다.

▲수조원대 큰 계약, 협상 노하우는 = 김 실장은 해외시장에서 대형 계약을 진행할 때 파트너십을 가장 염두에 둔다. 양쪽 다 윈-윈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계약 상대방과의 협력 관계를 이끌어내는 큰 원동력이다.

"어느 한쪽이 지는 것은 협상이라고 볼 수 없어요. 일회용이죠. 장기간의 협력 관계를 이끌어내기 어려워져요"

그는 거래 상대방을 굴복시키기보다 서로 각자의 회사로 돌아갔을 때 설득할 수 있는 상태로 협상하는 것이 진정한 파트너십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시간을 두고 절충안을 찾으며 마지막 최종 병기인 배짱을 발휘하는 순간까지 긴장을 끈은 놓지 않아야 한다.

"담당자와 사귀고 오랫동안 서로 인정하고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게 맞다"며 "거래 역시 이 거래가 얼마나 좋은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그는강조했다.

▲음식,문화, 나눈 만큼 돌아온다 = 대형 수주도, 플랜트 지원도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해외 상대방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유지하는 것은 곧 실력으로 이어진다.

가장 기억에 남은 경우는 이란을 방문했을 때였다. 수염을 길게 기른 이란 고위 관계자는 "여자와는 악수하지 않는다"며 완고한 태도를 보였다. 종교적 지위에 있던 그 사람은 뜻밖에도 한국 드라마에 관심이 많았다.

"대장금 이야기를 하며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의외로 유러머스하고 친절했어요. 이곳도 아시아라는 느낌이 들었죠"

김 실장이 한국을 방문한 해외 고객들과 주말 산행을 가거나 한옥마을을 소개하는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다.

김 실장은 "한국을 방문한 거래 기업의 관계자들이 개인적으로도 한국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갖기를 바란다"며 "그런 기억들이 다음 계약으로 이어지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힘"이라고 말했다.

1만 페이지에 달하는 계약서와 잦은 야근과 함께 문화 교류에서 오는 소소한 즐거움은 그를 수출입 금융 전문가로 성장시켰다.

▲원하지 않는 상황에 대처하기 =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하는 순간도 오는 법. 남의 돈을 버는 일은 쉽지 않다.

김 실장은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하는 순간에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생각을 한다.

"부정적이고 힘들다는 생각에 쓰는 에너지를 자기가 해야할 좋은 일을 하는데 써야 해요"

순간에 매몰되서는 미래를 볼 수 없다고 그는 힘줘 말한다. 김 실장은 "시계를 멀리 두고 미래의 내가 봤을 때 지금 뭘하면 좋을지를 생각하는게 좋아요"라고 덧붙였다.

평소 등산을 자주가는 김 실장. 그는 산에 오르면 자잘하고 아웅다웅하는 삶이 아득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힘든 순간에는 걸음을 멈추고 멀리 떨어져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 필요하다.

김경자 실장은 지난 1987년 입행한 후 법규부, 연불수출금융본부, 무역금융본부, 특수여신관리실, 프로젝트금융부, 해외투자금융부 등을 거쳐 올해 1월부터 국제협력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syj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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