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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유리천장. 일을 잘하고 똑똑해도 사회에서 여성이 높은 지위에 오르기까지 뚫어야 하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일컫는 말이다. 금융시장에 종사하는 여성들도 유리천장을 피할 수는 없었다. 금융시장도 4대 은행에 여성임원이 없을 만큼 두껍기로 소문난 유리천장이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유리천장을 깨고 상위 1%로 우뚝 선 여성 금융인들을 만나봤다. 신입사원 시절 조그만 실수에도 주눅이 들고 남몰래 울기도 했던 여직원이 실력파 임원이 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을까. 유리천장 아래서 연약한 꽃으로 남기보다 이를 뚫고 큰 나무가 되는 쪽을 택한 베테랑 여성 금융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서울=연합인포맥스) 정선영 기자 = "사람사는 세상에선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이 마음속에 콕 박힌다.

맞는 말이다. 아무리 큰일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낯설지 않다. 30년 넘는 은행생활도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이라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1980년 충청은행으로 입행해 대전, 천안에서 입지를 쌓아온 천경미 하나은행 본부장. 여성 본부장을 찾아보기 어려운 하나은행에서 수도권 외 지역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올해 본부장 승진을 한 만큼 내공도 남다르다.

천 본부장은 10년, 20년도 넘은 고객들과의 인연도 지금까지 유지할 정도로 사람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오래된 인연들은 지금까지도 그에게 든든한 배경이 돼 줬다. 천 본부장의 은행 수첩 속으로 들어가본다.

▲고객은 어디에 있을까 = 천 본부장이 처음 지점장이 됐을 때는 IMF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때였다. 당시 은행들이 속속 퇴출되면서 첫 직장인 충청은행이 문을 닫고 하나은행으로 인수됐다. 그 과정에서 마음이 떠난 고객들도 많았다.

예금이나 대출을 권유하면 문을 닫아버리기도 하는 등 고객 확보가 쉽지 않았다. 지역에서 기반을 일구다 보니 소액의 거래가 대부분이라 많은 고객을 만나야 했다. 그의 첫 질문은 "어디에 고객이 있을까"였다.

당시만 해도 지점장은 좀처럼 '찾아가는 영업'을 하지 않을 때였다. 천 본부장은 집을 사고파는 사람들은 큰돈이 움직인다는 생각에 부동산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부지런히 찾아다니고 기존 고객들로부터 소개를 받으며 대전에서 4년간 실적과 인맥을 톡톡히 쌓았다.

그리고 천안에 지점장으로 발령받아 가게 됐다. 태어나서 처음 가는 곳이었다.

"당시에 시골이었는데 여성 지점장이 흔치 않아서 오히려 덕도 많이 봤어요. 어르신들이 어여삐 봐주셔서 예금도 해주고 그랬어요"

첫번째 천안 고객은 기존 고객의 소개로 만났다고 한다. 점심을 먹고 고객이 다음날 아침에 집앞에 차를 대라고 말했다. 다음날 그 고객은 큰 금액의 예금을 해줬다. 이처럼 하나 둘 쌓은 인연 덕분에 천 본부장은 2008년 80개 대전 충남 지역 점포 영업을 총괄하는 충청영업추진부장을 맡았다.

"10년이 넘었죠. 영업을 떠나 오래 알고지낸 분들은 너무 소중해요. 지금도 연말이면 손으로 카드를 써 보냅니다"

▲"사실은 미혼" = 이건 쓰지 말라고 했지만 천 본부장은 미혼이다.

"어떻게 하다 보니 시기를 놓쳤는데 이번에 승진할 때 행장님이 결혼 안하면 임원 안 시켜준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는 직원들한테는 꼭 결혼하라고 한다. 미혼보다는 기혼인 편이 훨씬 자유롭다고 천 본부장은 말한다.

사람을 대하는 일인 만큼 구설에 오르지 않도록 신경을 쓰다 보면 미혼의 본부장이라는 타이틀이 때로는 부담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만큼 자기 관리가 필요하다 보니 고객들의 소개팅 제안도 조심스럽다고 그는 말한다.

"아무래도 미혼이면 모든 부분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철두철미해야 해요. 제가 근무하는 곳이 좁은 지역이라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신중하지만 싹싹하고 털털한 답변이 돌아온다. 사적인 부분도 깔끔하게 신경을 쓰는 성격 덕분에 어르신 고객들은 지금도 천 본부장을 딸처럼 챙긴다.

"고객 중에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많이 계셔서 연하장 늦게 보내면 전화가 와요"라며 천 본부장은 웃는다.

▲막걸리 마케팅 = 지난 2002년 어느 날. 천 본부장은 천안 아산의 한 마을 논두렁에 있었다. 당시 천안시 쌍용동 지점장이었던 천 본부장. 아산지구 신도시 개발 계획에 따른 토지보상금을 유치하기 위해 전력을 쏟아야 할 때였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마을을 방문했다. 은행 지점장으로서 토지보상금을 유치하고자 찾은 길이었지만 매일 만난 마을 어르신들과 차츰 얼굴을 익히게 됐다.

논두렁에서 어르신들께 막걸리를 한 잔 두 잔 대접하면서 어느새 첫째딸 같은 마음이 들었다. 매일 매일 정성 들여 찾아간 효과는 대단했다. 어르신들은 너도나도 하나은행을 택했다. 소박하고 진솔한 마음으로 다가선 덕분이었다.

천 본부장은 "당시 영업을 한다기보다 사람을 사귄다는 생각으로 매일 갔는데 나중에 많은 고객을 유치할 수 있었다"며 "특별한 스킬이 아니라 인간적인 정(情)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다"고 말했다.

완벽한 상품 설명보다 정성이 듬뿍 담긴 막걸리 한 잔이 고객의 마음을 움직인 셈이다.

▲소소한 추억의 힘 = 천 본부장은 은행 생활에서 가장 크게 남는 것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동료, 친구들과의 소소한 추억들은 비즈니스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직장생활에서 큰 힘이 된다.

신입행원 시절, 주판으로 급여를 계산하던 천 본부장. 몇 번이고 계산을 해도 100원이 틀려 전전긍긍하다가 혼자 울고 있었다.

천 본부장은 "그 때 선배 언니가 조용히 다가와 한번에 맞춰주면서 등을 두드려 줬는데 그 따뜻함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번은 사람이 있다는 걸 몰랐다가 실수를 한 적도 있다. 첫 지점장 시절 마지막 퇴근은 책임자 이상으로 정해뒀었는데 여직원 2명이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것을 모르고 문을 꽁꽁 잠가버린 것이다. 곧 발견해서 보안회사에서 문을 열어줬지만 천 본부장은 그때의 미안함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동료와 함께 울고 웃으며 보낸 시간은 아무리 오래돼도 빛이 바래지 않는다.

▲결국, 사람이 남는다 = "책임자, 지점장 시절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회사의 가장 소중한 자산은 직원이라는 원칙을 달리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천 본부장은 직원들이 회사에서 즐겁고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그만큼 열심히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그렇게 만드는 것이 그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직원들은 고객과의 접점이기도 하죠. 행복한 직원이 성과도 좋다는 말.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인간적인 교류와 신뢰가 바탕이 돼 쌓인 영업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고 천 본부장은 강조했다.

천 본부장이 후배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도 한 가지다. "진심으로 다가가세요. 반드시 그것이 성공의 열쇠가 될 것입니다"

천 본부장은 지난 1980년 충청은행으로 입행해 하나은행 대전 황실지점, 쌍용동 지점, 태평동 지점장을 거쳐 충청 영업추진부장을 맡은 후 올해 대전중앙영업본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syj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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