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순 외환은행 지점장>





<편집자주: 유리천장. 일을 잘하고 똑똑해도 사회에서 여성이 높은 지위에 오르기까지 뚫어야 하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일컫는 말이다. 금융시장에 종사하는 여성들도 유리천장을 피할 수는 없었다. 금융시장도 4대 은행에 여성임원이 없을 만큼 두껍기로 소문난 유리천장이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유리천장을 깨고 상위 1%로 우뚝 선 여성 금융인들을 만나봤다. 신입사원 시절 조그만 실수에도 주눅이 들고 남몰래 울기도 했던 여직원이 실력파 임원이 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을까. 유리천장 아래서 연약한 꽃으로 남기보다 이를 뚫고 큰 나무가 되는 쪽을 택한 베테랑 여성 금융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서울=연합인포맥스) 정선영 기자 = 구불구불한 복도를 따라 방으로 들어서니 황금 남자구두가 유리장 안에 놓여있다. 번쩍번쩍하다.

"저희 지점 직원들이 다 함께 영업 1등 해서 받은 골든슈에요"

구두를 주는 이유는 열심히 발로 뛰었다는 의미라고 이인순 신사동지점장이 설명을 곁들인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20살을 갓 넘긴 1981년부터 외환은행에 몸담았다. 외환은행 PB(프라이빗뱅킹) 1기로서 소매금융을 맡아오면서 참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 이 지점장은 말한다.

"그땐 지점장은 상상도 못했지. 30년 전의 동료들은 지금도 만나면 성격이 많이 달라졌다고 해요. 예전엔 창구에 손님만 와도 얼굴이 빨개졌었는데"

외환은행이 변화를 겪어 온 30년간 스무 살짜리 수줍던 신입행원도 함께 자랐다. 이 지점장의 첫마디는 이랬다.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시작할까요"

부드러운 카페라떼 한 잔과 함께 이 지점장의 은행 이야기를 들어봤다.

▲사람은 농사짓는 마음으로 = 대리가 되고 나서 이 지점장은 외환은행 PB 1기로 출발했다.

어느날 지점장이 섭외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이를 계기로 고객을 발굴하는 영업 업무인 섭외전담 책임자제도로 2년 동안 영업을 하게 됐다.

고액 자산가 고객을 대하면서 기본기를 닦은 이 지점장은 압구정지점 현대백화점에서 본격적으로 PB업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돈 많은 고객의 선호를 일일이 다 맞추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처음부터 영업하려고 하면 첫 만남부터 어색해지게 마련이다. 이 지점장은 당장은 영업에 성공하지 못해도 그 고객과 오랫동안 인연을 맺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좋은 인간관계를 맺으면 5~10년 뒤에 그 고객은 잊지 않고 찾아줍니다. 농사를 지어 수확하는 것처럼요"

이상적인 말처럼 들리지만, 고객 농사의 효과는 실제로 나타났다.

▲고객 감동 & 감동 고객 = 압구정에서 근무하다가 평창동 지점장으로 첫 발령을 받았을 때였다. 한 고객이 수십억원의 수표를 들고 찾아왔다.

"지점 거래가 많지 않았던 고객이었어요. 그런데 평창동 지점으로 옮겼다고 하니까 예금을 해주러 오신 거였어요. 정말 감사했죠"

이뿐만이 아니었다. 평창동 지점 시절 또 다른 고객은 검은색 파일을 하나 갖고 왔다. 이 지점장이 여성 지점장으로 발령을 받으면서 신문기사가 났는데 기사를 복사해서 스크랩을 해 준 것이다.

"가판대를 5군데나 찾아다니셨다고 하셔서 너무 감동을 받았어요. 지금도 집에 파일을 보관하고 있어요"

도대체 그 비결이 무엇일까. 그것은 센스였다. "고객이 흘려버리는 말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해요"

이를테면 담배를 끊었는데 불편하다는 고객이 있으면 주전부리를 보낸다거나 어딘가 몸이 안좋다고 하면 약효가 있는 지역 특산물을 보내는 등의 센스다.

이 지점장은 "선물 사는 거 좋아해요. 뭐가 필요할까 생각하는 것도 좋고. 그런데 양은 줄이더라도 품질은 무조건 좋은 것으로 고르려고 하죠"

자산가 고객을 대하면서 배운 점도 많았다. 언젠가 상당한 자산을 가진 고객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돈을 어떻게 이렇게 많이 버셨습니까"

그러자 고객이 말했다. "돈을 쫓아다니지 말고 돈 들어오는 길목에 홈을 파놓는 겁니다. 길목을 터놓는 작업을 잘 한거죠"

사람을 감동시키면 언젠가는 다시 그 감동이 되돌아오는 법이다.

▲문화 마케팅으로 시선 집중 = "보너스를 타면 그림을 한 두 점씩 삽니다"

벽에 김덕기, 전병현 등 화가들의 그림이 걸려 있다. 고풍스러운 한옥 문살로 된 지점 인테리어와 잘 어울린다.

이 지점장에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평창동 지점이 계기가 됐다.

당시 평창동 지점 이전 계획을 세웠는데 170평이나 되는 공간에 지점이 들어가게 됐다.

넓은 공간을 영업점으로 주면 뭘 해보고 싶냐고 상사가 물었다. 갤러리를 해보고 싶다고 답했다. 근처에 갤러리나 옥션이 있어 미술품을 접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련된 로즈갤러리는 톡톡히 주목을 받았다. 김창렬, 김흥수, 이종상 등 유명 화백들의 그림들을 전시하자 고객들은 신기해하며 그림 구경을 왔다. 그림을 구입하거나 아예 거래를 옮긴 고객도 많았다.

지금의 신사동 지점에서도 문화마케팅은 이어졌다. 친분이 있던 윤효간 피아니스트의 제안으로 단양중학교 학생들 160명을 지점으로 초대해 피아노 연주회를 열었다. 객장을 치우고 200여 개의 의자를 놓는 일은 힘들었으나 지점 홍보는 물론 좋은 추억까지 덤으로 남았다.

▲때로는 쉬어라 = 아침마다 은행에 출근하기 싫었던 날은 손에 꼽을 정도라는 이 지점장. 그러나 그도 항상 즐거웠던 것은 아니다.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고객들이 손해를 봤을 때는 충격도 컸다. 슬럼프를 겪으면서 변화를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환은행은 자기계발 휴가가 있어 1년간 미국에 다녀왔다. 랭귀지스쿨에 등록을 하고 운동화를 신고 배낭을 멘 학생이 됐다.

은행을 다니면서 건국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할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공부를 하면서 재충전을 하면서 슬럼프를 무사히 넘겼다.

"그때 알았어요. 너무 일에만 집중하는 것보다 힘들 때는 한 걸음 쉬어가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이 지점장은 어느 조직에서든 내 몫을 하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물론 그 몫을 하기는 참 어렵다.

"항상 밥값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팀원들도 각자 자기 몫을 충실히 하면 문제가 없거든요"

그는 또 지금은 은행들이 너무 많고 서비스도 워낙 좋아서 변화를 주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틀에 박힌 모범생 같은 은행원의 모습으로는 경쟁력이 없어요. 경쟁에서 이기려면 차별화를 어떻게 할지 생각해야 할 거에요"



이인순 지점장은 지난 1981년 외환은행으로 입행하고 나서 평창동 지점장, 개포동지점장을 거쳐 현재 신사동지점장을 맡고 있다.

syj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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